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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6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2006-2009)

글로벌 경제의 추락

한국 경제는 2006년도에 수출 3,000억 달러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동안 자구책으로 펼쳐왔던 기업구조 개선과 구조조정의 효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화의 강세가 이어지면서 수출 수익성이 낮아져 기업들의 경영을 압박했으며, 근로자의 소득 정체로 인해 가계 경제는 성장하지 못했다.
2007년도에는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만 1,695달러로 드디어 2만 달러 대를 처음으로 돌파했다. 이제 다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반면에 2007년 7월부터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오히려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고용이 불안해지고 소비 위축 심리가 강해졌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일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어서 평양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2004년 12월 개성공단에서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노동력이 합쳐져 남북합작품 1호가 나온 이래 남북관계에 있어 역사적인 일이었다. 금강산 관광으로 시작되었던 남북교류는 더욱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2008년 2월에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경제 살리기’와 ‘국민 통합’에 중점을 두었으며 실용주의를 표방했다. 이른바 ‘MB노믹스(MBnomics)’라 불리는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그가 대통령후보로서 내세운 경제공약은 ‘줄푸세 타고 747’이었다.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과 질서는 세우자. 또 연평균 7% 경제성장을 이뤄 국민소득 4만 달러의 시대를 열어 7대 경제 강국에 진입한다는 목표였다. 경제대통령을 꿈꾸었던 국민들의 기대는 결국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국민 통합의 길을 가보지도 못한 채 분열로 치달았다.

2008년 9월 15일, 미국 최고의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미국 경제는 중병에 걸렸다. 파산 도미노의 공포가 엄습해 2008년 10월 24일 세계 증시는 악몽의 금요일을 맞이했다. 갈수록 세계 경제 전망은 어둠뿐이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관련 기사>


한국에 또다시 IMF 경제위기가 온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정부는 미국과 3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스와프(Currency Swaps)협정을 서둘러 체결하는 등 바쁜 움직임을 보였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발전해 전 세계를 강타했다. 한국 경제는 57억 7,63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추운 겨울로 향했다.


그칠 줄 모르는 아웃도어의 기세

2000년대 중반 이후 주5일근무제 확대, 웰빙 열풍, 몸짱 트렌드 등과 맞물려 스포츠와 레저 산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날로 드높아져 아웃도어 시장은 계속 확대되었다. 10년 장기 불황을 겪었던 일본처럼 한국도 웰빙 트렌드가 대세였다.
국내 아웃도어 시장의 성장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연간 30% 이상의 꾸준한 상승 곡선을 그리는 형국이었다. 의류 경기가 최악인 상황 속에서도 아웃도어 의류와 용품만은 홀로 호황을 구가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삶의 목표로 실행하는 웰빙 바람이 고기능 소재의 제품을 선뜻 집어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웃도어 시장에 뛰어든 업체들 대부분은 디자인 측면에서 취약했고, 기능성만으로 승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제품 구성도 남성 중심의 구색으로 일관되어 여성 취향의 제품이 특히 부족한 편이었다. 반면에 고기능성은 계속 업그레이드되었다. 고어텍스 팩라이트(GORE-TEX Paclite)까지 아웃도어 의류 소재로 쓰이게 되었다. 팩라이트는 낙하산 원단으로 사용되는 소재로 깃털처럼 가벼우나 비바람에 강한 장점을 지녔다. 2003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조난 사건 때 한국의 연구원들이 고어텍스로 만든 옷을 입고 버텼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고어텍스의 인기는 최강으로 군림했다. 아웃도어 시장은 크게 3분류로 판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첫째, 외국 유명 브랜드가 직접 진출하거나 또는 라이선스 형태로 힘을 빌려 만드는 세력이었다. 노스페이스, 컬럼비아 등이었고, 둘째, 아예 제품을 수입해오는 브랜드로서 아이더, 에이글, 파타고니아, 몽벨 등이 있었다. 셋째, 국내 업체가 내놓는 토종 브랜드로 블랙야크, 코오롱스포츠, 에델바이스, K2 등이 선전을 펼쳤다.

<고어텍스 X-PEAK 자켓 광고>


전반적인 의류 매출 부진을 겪은 백화점 업계는 아웃도어 상품으로 매출을 만회하기 위해 입점을 점차 늘려나갔다. 그리고 국내 아웃도어 업체는 해외 진출을 노리는 경우가 더 늘어나고 있었다. 코오롱스프츠는 2006년 9월 베이징에 첫 매장을 오픈시켰다. 2008년 4월에는 밀레 브랜드의 에델바이스아웃도어가 프랑스와 공동합작으로 중국에 회사를 설립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에 등산 인구는 1,000만 명, 사이클 인구는 300만 명, 러닝 인구는 200만 명으로 파악했다. 날로 증가하는 등산 인구를 잡기 위해 신규로 참여하는 업체는 나날이 많아졌다. 2007년 9월 이랜드가 영국의 버그하우스와 라이선스를 체결하고, 2008년 1월부터 아웃도어 시장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다. 황금 시장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아웃도어는 기능성과 패션성까지 접목해 소비자 니즈를 충족시켜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원동력을 발판으로 아웃도어 시장의 규모가 1조 5,000억 원에 육박하게 되었다. 아웃도어 시장은 ‘블랙야크, 노스페이스, 코오롱스포츠, K2, 컬럼비아’의 5강 체제가 굳혀졌다. 상위 브랜드들이 전체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2008년도에는 ‘빅 5’의 아성에 도전하며 유럽, 미국 등의 신규 브랜드가 8개나 새로 선보였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너무 편한 의류라는 인식은 갈수록 제고되었다. 또한 대형 규모의 매장으로 문을 여는 대리점이 많아졌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웃도어 전문 매장이 등장한 것도 시장 성장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 2008년에는 중저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다양한 친환경 소재들이 에코 패션으로 등장했다. 전반적인 경기 침체 속에서 아웃도어 제품만은 예외였다. 성장률이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전체 시장의 매출은 신장되어 무려 10년 만에 10배 가까이 관련 시장이 성장했다.
2009년 7월, 휠라코리아는 아웃도어 휠라스포트 브랜드로 2010년 봄에 아웃도어 시장에 도전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K2코리아는 프랑스 브랜드인 아이더의 국내 상표권을 인수했다. 불황에 더 강한 모습을 보인 아웃도어 시장은 금융위기, 불황 등의 우울한 단어와는 상관없이 쾌속 순항했다.

더욱 풍성해진 산악계

2005년 3월 초, 대한산악연맹은 이인정 부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만장일치 추대했다. 그는 록클라이머 출신으로 한국산악박물관과 한국산악도서관을 세우면서 산악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다. 2009년 1월에 이인정 회장은 재추대되었다.
서울시산악연맹은 2005년 12월 13일에 창립 40주년을 맞아 <서울시산악연맹 40년사> 발간기념식을 갖고 각계에 배포를 했다. 강태선 연맹 회장은 “역시 40년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한편, 2006년 봄부터 에베레스트 도전에 나선 한국 원정대가 9개 팀이나 몰렸다. 원정팀 모두가 정상을 밟아서 100% 성공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8,000m급 14개 거봉을 완등한 한왕용은 히말라야 청소등반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클라이머들이 많이 몰려들어 쓰레기가 많이 쌓이는 루트를 따라다니며 캠프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수거했다. 그는 2008년에 ‘히말라야클린산악대장정’을 끝냈다.
2006년 1월에는 우이동의 오투월드 실내빙벽장에서 국내 최초로 실내빙장빙벽대회가 개최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20m 실내 수직빙벽으로 기네스 기록에도 올라갔다. 2008년부터는 충북 영동의 인공빙벽장에서도 대회가 시작되었다. 이제 한국의 빙벽 수준은 국제대회에서도 상위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2006년 4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추죄하고 대한올림픽위원회(KOC)가 주관한 스포츠관련 학술대회에 국제산악연맹(UIAA)의 임원들이 참석했다. 앞으로 스포츠클라이밍과 산악스키 분야를 올림픽 정식종목에 가입시키기 위해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2006년 4월 8~9일 제2회 블랙야크배 서울국제볼더링대회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개최되었다. 많은 관중을 끌어 모았고 일반인들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체육행사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리기는 처음이었다.
2006년 8월부터 대한산악연맹은 등산강사 및 등산가이드 공인자격제도 연수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해 2007년 연수를 통해 첫 합격자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2009년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등산교육원이 설립되었다. 전문등산강사 및 가이드 교육, 범국민등산교실 등이 개설되었다.
2008년 5월 28일에는 (사)엄홍길휴먼재단이 설립되었다. 엄홍길은 2004년 2월에 세계 최초의 16좌 도전을 발표했다. 8,000m급 거봉이면서도 14좌의 주변 봉으로 여겨져 온 얄룽캉(Yalunkang, 8,505m)과 로체샤르(8,382m)가 목표였다. 그는 2004년 5월 5일 얄룽캉 등정에 성공했고, 2007년 5월 31일에 4번째 도전 끝에 로체샤르를 등정해 ‘14+2=16’이라는 거대한 꿈을 이루었다.
그 이후, 엄홍길은 산을 위해서 무언가 되돌려 줄 일을 찾다가 “도전의 산에서 내려와 인생의 산에 도전하겠다.”라고 뜻을 밝혔다. 그는 재단 설립 이후, 네팔 히말라야의 오지에 초등학교를 지어주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한편, 서울시산악연맹은 대한산악연맹, 한국산악회, 한국대학산악연맹과 함께 삼각산, 도봉산 등에 산재해있던 산악인들의 추모비와 동판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 ‘산악인 합동추모비 건립사업’을 추진했다. 마침내 2008년 7월에 삼각산 무당골 자락에 합동추모비가 세워졌다. 서울시산악연맹은 2009년 2월에 조규배 회장이 취임을 했다. 강태선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여성 산악인 오은선 후원 협약식>

 

<2008년 산악인 합동추모비 건립>

이 시기에는 등산 붐이 전 국민적으로 일어났다. 한국리서치의 2009년도 조사 자료에 의하면, 매월 1회 이상 산행을 하는 국민이 1,5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국민의 1/3 이상이 등산을 즐기는 셈이었다. 이런 등산 인구 증가에 힘을 더 보태는 일도 생겼다. 전국적으로 트레일(Trail) 코스 개발 붐이 일었던 것이다. 명산들의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강화도 나들길, 북한산성길 등 각 지역에서는 걷는 길 등의 산책길까지 전국적으로 곳곳에 설치되었다. 친환경적인 활동 지향성과 국민의 건강증진 욕구, 삶의 질 향상 등이 반영된 결과였다. 또한 트레일의 관광 상품화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및 발전까지도 모색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의 산악 문화는 더욱 풍성해져 산악다큐멘터리, 산노래, 산악연극, 산악소설, 산 사진, 산 그림 등 전국 도처에서 산악문화 활동이 대단히 활발해졌다.

새로운 역사를 위한 도전

2004년에 한국 여성 최초로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오은선은 2005년부터 14좌 거봉 완등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한편, 스포츠 클라이밍 여자 세계랭킹 5위 안에 드는 고미영 선수가 2006년 초오유 등정에 성공한 뒤 히말라야 고산등반가로 변신하고, 14좌 완등 목표를 세상에 공표했다. 고미영은 암벽과 빙벽 모두 세계 정상급이었고, 뒤늦게 시작한 산악스키도 국내 정상에 올랐다. 김재수 대장을 만나 고산등반의 도움을 받았으며, 코오롱스포츠와 후원 계약해 오로지 등반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춰졌다. 반면 오은선은 소속 회사가 없는 상태였다.
2008년 2월 21일, 동진레저는 여성 산악인 오은선과 후원 계약을 체결했다. 앞으로 5년 동안 후원금과 더불어 등산복과 장비 등을 후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오은선은 14개 거봉 중에서 9개를 남겨놓은 상태로 아시아 여성 최다 등정의 기록 보유자였다.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인 블랙야크가 여성 산악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을 응원하게 되었다. 그동안 동진레저는 수많은 산악단체와 산악인들을 후원 및 지원해왔었다. 이번 후원을 계기로 블랙야크는 정통 프리미엄 아웃도어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강태선 사장은 “지금까지는 엄홍길, 박영석 등 남성 등반가들의 역사였다면, 지금부터는 오은선 씨를 중심으로 한 여성 등반가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은선은 “오스트리아의 겔린데 칼텐브루너(Gerlinde Kaltenbrunner)와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Edurne Pasaban), 이탈리아의 니베스 메로이(Nives Meroi)가 있지만, 나는 이들의 벽을 뛰어넘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해외 원정은 비용이 많이 들어 일단 떠나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제 야크처럼 든든한 동진레저와 후원 계약을 맺었으니 대여섯 봉은 이미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당시 오은선은 5개, 고미영은 4개, 칼텐브루너는 10개, 파사반은 9개를 기록했다.
155cm, 48kg의 작지만 강한 여성 산악인 오은선 대장은 2008년 5월 13일 마칼루 정상에 섰다. 한국 여성 최초로 8,000m급 거봉을 무산소로 등정하는 기록도 세웠다. 이후 등반은 역시 무산소로 이뤄졌다. 2008년 5월 26일 로체, 2008년 7월 31일 브로드피크, 2008년 10월 12일 마나슬루를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세계 여성 산악인 최초로 한 해에 4좌 연속 등정에 성공했다. 에드루네 파사반, 니베스 메로이가 2003년 한 해에 3좌 연속 등정을 했는데, 한국의 오은선이 바로 그 기록을 깨버렸다.

<2008년 마나슬루 정상의 오은선 대장>


 

두 한국 여성의 기개

2009년 한국의 두 여걸들은 한 해에 4개의 8,000m급 거봉을 등정하는 세계적인 대위업을 달성했다. 세계적인 여성 산악인 3인방을 열심히 추격해 이제는 어깨를 견주게 되었다. 오은선 대장은 2009년 5월 6일 칸첸중가, 2009년 5월 21일 다울라기리 Ⅰ봉 등정에 성공했다.
2009년 6월 중순, 파키스탄의 정국 불안에도 불구하고 강태선 사장은 오은선 대장을 응원하러 낭가파르바트로 향하고 있었다. 탈레반들이 차량에 총구를 겨누는 위험한 상황들을 겪으면서 찾아갔다. 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이다. 2009년 6월 28일 18시경, 강태선 사장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오은선 대장과 반가운 재회를 나누고 에너지를 보충시켜주었다. 순대나 홍어삼합 등 오은선 대장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공수해갔던 것이다. 이날 코오롱스포츠팀의 김재수 대장과 고미영도 이곳에 캠프를 차리려고 도착했다.
정상 공격의 날이 다가오자 강태선 사장은 염소를 잡아 오은선 대장의 체력을 보강시켜주었다. 외국의 등반대 대원들은 그에게 다가와 블랙야크를 좋아한다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KBS의 동행 취재팀도 바쁘게 움직였다.

<오은선 대장의 무사등정을 기원하는 강태선 사장>


2009년 7월 10일 13시 47분경, 낭가파르바트에 제트 기류가 발생했지만 오은선 대장은 정상 등정에 성공을 했다.

<2009년 낭가파르바트에서의 오은선 대장>

<2009년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 오은선 대장>


오은선 대장은 하산 도중에 고미영을 만나게 되었다. 코오롱스포츠팀은 저녁 정도에나 등정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18시 25분경, 고미영의 등정 성공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후 블랙야크팀은 저녁식사 도중에 고미영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김재수 대장과 낭가파르바트에 등정을 하고 하산 도중에 실족했다는 것이다. 지원 요청을 받은 블랙야크팀은 60m 로프와 산소 1개, 따뜻한 물과 음식 등을 지원했고, 구조 활동에 동참하기 위해 오은선 대장은 캠프3에서 대기했으나 날씨가 계속 좋지 않았다.

처음 고미영의 추락 소식을 듣고 오은선 대장은 숨이 막혔다. “정상 등정을 축하해요. 조심히 하산하세요.”라고 말했던 고미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은선 대장 역시 “조심히 등정하길 바라고, 베이스캠프에서 보자.”라며 서로를 격려했었다. 산을 사랑하는 아까운 동료를 잃게 되었다. 고미영은 무려 3개월 만에 4개 봉우리를 밟았는데, 이제 그만 11개에서 멈추고 말았다. 2년 9개월 만에 11개 거봉에 오른 대단한 한국의 여걸은 산의 품 속에 안겼다.
2009년 8월 3일, 오은선 대장은 가셔브룸 Ⅰ봉 정상에 무산소 등정을 해냈다. 역시 강행군, 무산소, 속공의 대명사다웠다. 고미영의 사망사고로 심리적인 갈등을 일으켜 올해에는 등반을 접을까 고민도 했었다. 그래도 계획된 길이니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나섰다. 이제 오은선 대장은 13좌로 마지막 하나만 남겨두었다. 이제 칼텐브루너는 12좌, 파사반은 12좌, 메로이는 11좌였다.
2009년 10월, 제트 기류로 인해 오은선 대장은 안나푸르나 정상을 두어 시간 남겨두고 안타깝게 발길을 되돌렸다. 해를 넘겨 다시 도전에 나선 오은선 대장은 2010년 4월 27일, 마침내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 마침내 8,000m 거봉 14좌에 모두 올라섰다. 월드 퍼스트 우먼의 위대한 도전이었다.

<2010년 오은선 대장의 안나푸르나 등반 모습>


오은선 대장은 “산이 나에게 가르쳐준 교훈 하나는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정상의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강태선 사장께서는 단 한 번도 등정에 대해 성공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게 너무나 고마웠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깊은 배려였다. 또 그런 곳에 가면 꼭먹기 어려운 것이 먹고 싶은데, 그걸 아시고 꼭 공수해주었다. 블랙야크의 직원들도 항상 고마웠고, 특히 히말라야에서 훌륭한 발이 되어주었던 블랙야크의 등산화도 감사했다.”라고 밝혔다.
그녀의 도전은 경제위기로 모든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쾌거였다. 특히 한국의 여성들과 주부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블랙야크의 응원도 영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