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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6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아웃도어의 시대 (2000-2005)

IMF 졸업과 희망의 경제

1998년 2월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대기업 육성 대신에 벤처기업과 중소기업 육성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한 국민들 덕분에 정부는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전액 조기에 상환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2001년 8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라고 공식 발표를 했고, 잃어버렸던 경제 주권을 IMF로부터 되찾아온 날이었다. 한국의 경제는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통해 성장의 불씨를 그나마 되살렸다. 1999년도 경제성장률은 10.7%, 2000년도는 8.8%로 상당히 선전을 펼쳤다. 하지만 부동산 규제 완화와 그린벨트 해제 등으로 투기를 불러오고, 신용불량자를 대거 양산한 ‘카드대란’의 사태를 낳았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철폐로 많은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었고, 붕괴된 중산층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 직접 가서 남북정상회담을 하였다. 남북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성큼 다가와 일명 ‘햇볕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2002 한・일 월드컵을 앞에 두고 일본의 대중문화가 단계적으로 개방되었으며, 월드컵 개최와 축구대표팀의 4강 신화를 바탕으로 국민들은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2003년 3월 20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고유가 시대가 열리면서 세계 경기는 급속히 둔화되었다. 과거와 같은 고성장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여기에다가 북한 핵문제까지 터져 해외 자본의 유치 금리가 상승했다. 이런 여건 속에서 2003년 2월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다. 자유시장경제의 중시, 규제 완화,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의 정책을 내놓았다. 강력한 부동산 투기 대책으로 말미암아 시중의 자금은 주식으로 대거 이동했다. 그러나 집값은 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급등의 추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다행히도 2005년부터 인위적인 경기부양 정책 없이도 수출과 소비가 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4년도에는 1만 5,082달러로, 2005년도에는 1만 7,531달러로 소득이 신장되면서 한국 경제는 희망과 자신감을 다시 품게 되었다.

 


전문 산악인들 금강산을 품에 안다

1978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오른 날(1977년 9월 15일)을 기념해 ‘산악인의 날’ 행사가 처음으로 거행되었다. 이후 매년 개최되다가 재정 문제로 인해 1992년부터 행사가 중단되면서 각 시・도연맹의 자체행사로 전락되었다. 이에 대한산악연맹은 새천년을 맞이해 다시 행사를 부활시키게 되었다. 산악인의 날은 2000년 9월 15일 다시 거행되었으며, 제1회 대한민국 산악대상 시상식도 처음으로 열렸다. 첫 수상의 영광은 양대 산악단체의 화합과 역할 보완을 위해 한국산악회에게 돌아갔으며, 이후부터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등이 차례대로 그 영예를 안았다. 이후 대한민국 산악대상은 산악인에게 명예로운 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 금강산 관광은 산악계에게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실향민이나 일반 국민들은 물론, 산악인들도 금강산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며, 전문 산악인들이 금강산에서 파견근무도 하게 되었다. 관광객들의 안전사고에 대비해 현대아산은 서울시산악연맹 산하의 서울시산악조난구조대 3명을 현지에 배치했다. 한편, 금강산행 호화여객선에 마련된 동진레저의 선상 매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았으며 큰 홍보 효과를 누렸다.
금강산의 산악구조대 활동을 보면서 북한 당국은 우리 산악계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우리 전문 산악인들의 간곡한 요청이 받아들여져 전문 산악인들이 대거 금강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2004년 1월 서울시산악조난구조대가 구룡폭포와 비봉폭포를 등반했다. 총 35명의 등반대가 출정해 초등정의 성과를 일궈냈다.

<평화의 길을 개척하고 정상에 오른 남북한 대원들>

구룡폭포는 높이 74m로 우리나라 3대 폭포이며, 비봉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이다. 북측의 안내원들은 빙폭 등반에 대해 큰 호기심을 보였고, 평양에서도 관계자들이 직접 나와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그들은 “위험하지는 않느냐? 남쪽에서는 많이 하는 스포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한국등산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식>


2005년 1월에는 한국등산학교 30주년 기념으로 금강산에서 교육 행사가 열렸다. 동계반 교육을 실시했는데, 전국의 산악인들은 대단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빙폭과 설상 교육 등이 실시되었는데, 세존봉(1,122m)에 오를 때에는 북쪽의 안내원들이 “절대 불가능하다. 내기를 해도 좋다.”라며 못 믿겠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같이 동행했던 그들은 스키를 이용해 등반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신기해했다. 이 행사에 참석했던 철의 여성, 산악인 오은선은 “금강산은 정말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기만 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익스트림 관심과 웰빙 열풍

유럽에서는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이해 제1회 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이 처음 개최되었다. 한국은 1997년 1월에 국내 빙벽대회를 처음 개최하고, 국제빙벽 무대에서도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스포츠클라이밍과 함께 아이스클라이밍에서 세계 상위권에 랭크되는 기록을 하나씩 세워나갔다. 2003년 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 종합랭킹에서 고미영이 힘센 서양인들을 제치고 세계랭킹 5위에 진입했다.
또한 스포츠클라이밍에서는 손상원과 고미영이 5.14급 클라이머 대열에 합류했다. 5.14급은 바둑으로 치면 프로 9단의 실력이 되는 경지로, 오버행(overhang)에 매달려 손가락 반 마디 정도만을 이용해 움직여야 하는 최고의 난이도다.

 

2004년 10월에는 샛별로 떠오른 16살의 ‘스파이더 걸’ 김자인이 아시아스포츠클라이밍선수권대회에서 아시아 최강자인 고미영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신세대 레포츠로 각광받은 스포츠클라이밍은 생활체육으로 확산되면서 산악문화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렇게 걸출한 선수들이 배출되자 2004년 7월에는 기업체에서 익스트림스포츠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3월 26일에는 제1회 블랙야크배 국제볼더링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동진레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국제등반경기가 열렸다. 기존에 국내에서 많이 행해지던 속도와 난

이도 경기 이외에 볼더링까지 개최된 점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대회 규모를 국제대회로까지 확대시킨 일도 신선한 바람이었다. 볼더링(Bouldering)은 암벽 등반의 한 장르로 아무런 장비 없이 험한 바위를 오르는 행위를 말한다.

 

<제1회 블랙야크배 국제볼더링대회>


2000년대에 들어 국내에는 다양한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과 스포츠의 재미에 빠져들었던 셈이다. 특히 래프팅(Rafting), 번지점프(Bungee Jump) 등은 많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한편, 한국의 산악문화도 훨씬 기틀이 단단해져갔다. 2000년부터 <산악연감>이 매년 발간되기 시작해 국내외 산악활동에 대해 충실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2001년 10월에는 산악전문잡지 이 창간되었으며, 2002년에는 등산학교의 표준 교재로 활용하기 위한 <등산>이 발간되었다. 2002년 5월 6일에는 대표급 여성 산악인 49명이 모여 한국여성산악회를 창립했다. 여성 산악인들의 높아진 위상을 반영하는 일이었다.
한국은 2004년부터 일본과 갈등을 겪었다. 일본 총리의 독도 발언과 일본 언론의 왜곡보도 등으로 감정이 악화되었다. 굴욕적이었다며 뒤늦게 문제로 불거진 신한일어업협정 체결 때문에 국민들은 분노와 지탄을 보냈다. 이때 산악인들은 뜻을 모아 2005년 3월 21일 독도수호 성명서를 발표하는 단결된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일본의 망동에 분노하며 600만 산악인은 이를 규탄한다.”라며 강한 의지를 표출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간신히 한숨을 돌린 국민들은 고급 스포츠를 자제하면서 산을 많이 찾게 되었다. 특히 실속파들은 등산과 조깅 등을 생활체육으로 삼았다. 2003년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웰빙(Well-Being) 열풍과 2004년 7월부터 단계적 시행에 들어간 주5일근무제의 확산 등으로 레포츠 등 여가활동을 즐기는 인구가 크게 늘었다. 또한, IMF 시절에 명예퇴직과 실업의 고통을 산에서 해소했던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된 뒤에도 계속 산을 다니게 되었다. 부부끼리 등산을 즐기는 등 많은 여성들도 산을 찾게 되었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면서 건강과 미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연스럽게 등산의류를 비롯해 용품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첨단 소재와 기능성에 대한 인식도 확산되었다. 그런데 등산복 등의 제품을 살 때 구매의 최종결정권자는 대부분 주부들이었다. 당연히 패션을 따지는 소비 패턴을 보여주게 되었다.

아웃도어 산업으로의 시동

1990년대 말 등산의류가 새로운 패션시장으로 성장하자 대기업들이 또다시 앞 다투어 수입 브랜드를 도입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해외 명품 브랜드라는 홍보를 통해 소비자를 유혹했다. 1970년대 후반 해외 원정의 붐과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의 특수를 타고 수많은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뛰어들었던 전철을 다시 밟았다. 선경, 삼성, 대우 등 대기업들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등산용품 업계에 뛰어들었다가 대부분 실패를 맛보았다. 다품종 소량 생산, 노동집약적인 산업의 특징과 함께 등산용품에 대한 전문성 결여로 코오롱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번에 그들은 수입 브랜드의 도입을 통해 주로 등산의류에 주력했다. 아웃도어 상품이 전반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고속성장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열풍과 ‘아웃도어 라이프’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하나의 산업 장르로 성큼 성장을 해나갔다.
아웃도어 시장 규모는 2000년 3,110억 원에서 2003년 6,435억 원 규모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 동안 평균성장률 23%의 폭발적인 신장세였다. 소비자층은 일상생활에서 레저를 즐기는 모든 일반인으로 확대되었다. 웰빙 열풍과 주5일근무제 확대는 상당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한 아웃도어는 등산・레저용품 및 의류 등 전통적인 시장에서 벗어나 하나의 트렌드로 인식되면서 캐주얼웨어 등의 영역까지 침투했다. 전자제품 업체들은 MP3 플레이어 등 휴대용 전자기기에도 ‘아웃도어용 제품’을 잇달아 선보이는 마케팅을 벌일 정도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아웃도어 시장은 춘추전국시대에 다시 돌입했다. 국내 브랜드인 코오롱스포츠와 영원을 비롯해, 수입 브랜드인 노스페이스, 컬럼비아, 밀레, 몽벨, 아이더, 에이글 등이 전열을 가다듬고 뛰어들었다. 특히 골드윈코리아의 노스페이스는 새로운 럭셔리 브랜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순수 국내 브랜드인 에델바이스로 오랜 역사를 자랑해온 한고상사는 밀레를 독점으로 들여왔다. 1982년 메아리산악으로 출발한 에코로바도 에이글을 수입 판매했다.
또한 등산화로 출발했던 K2상사는 토털 브랜드로 변화를 꾀했으며, 1973년에 창업해 등산장비전문업체로 유명했던 동진레저는 기본과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부단히 생산했다. 블랙야크 브랜드 탄생 이후에는 아웃도어 시장에 적극 대응을 했다. 등산용 가스기구 전문업체인 코베아처럼 전문분야에만 집중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특히 아웃도어 시장에 있어서 원단이 가장 중요한 무기로 떠올랐다. 가장 각광을 받은 고어텍스와 고어코리아에서 선보이는 다양한 첨단 소재는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고어코리아에게 정식으로 공급받아 생산 및 판매하는 업체는 당연히 시장에서 선전을 펼쳤다. 블랙야크를 비롯해, 코오롱스포츠, 노스페이스, 컬럼비아, 에델바이스, 골드윈, 헤드, K2, 밀레, 프로스펙스, 영원, 아식스 등의 브랜드가 정식으
이도 경기 이외에 볼더링까지 개최된 점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대회 규모를 국제대회로까지 확대시킨 일도 신선한 바람이었다. 볼더링(Bouldering)은 암벽 등반의 한 장르로 아무런 장비 없이 험한 바위를 오르는 행위를 말한다.
2000년대에 들어 국내에는 다양한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과 스포츠의 재미에 빠져들었던 셈이다. 특히 래프팅(Rafting), 번지점프(Bungee Jump) 등은 많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한편, 한국의 산악문화도 훨씬 기틀이 단단해져갔다. 2000년부터 <산악연감>이 매년 발간되기 시작해 국내외 산악활동에 대해 충실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2001년 10월에는 산악전문잡지

 

이 창간되었으며, 2002년에는 등산학교의 표준 교재로 활용하기 위한 <등산>이 발간되었다. 2002년 5월 6일에는 대표급 여성 산악인 49명이 모여 한국여성산악회를 창립했다. 여성 산악인들의 높아진 위상을 반영하는 일이었다.
한국은 2004년부터 일본과 갈등을 겪었다. 일본 총리의 독도 발언과 일본 언론의 왜곡보도 등으로 감정이 악화되었다. 굴욕적이었다며 뒤늦게 문제로 불거진 신한일어업협정 체결 때문에 국민들은 분노와 지탄을 보냈다. 이때 산악인들은 뜻을 모아 2005년 3월 21일 독도수호 성명서를 발표하는 단결된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일본의 망동에 분노하며 600만 산악인은 이를 규탄한다.”라며 강한 의지를 표출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간신히 한숨을 돌린 국민들은 고급 스포츠를 자제하면서 산을 많이 찾게 되었다. 특히 실속파들은 등산과 조깅 등을 생활체육으로 삼았다. 2003년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웰빙(Well-Being) 열풍과 2004년 7월부터 단계적 시행에 들어간 주5일근무제의 확산 등으로 레포츠 등 여가활동을 즐기는 인구가 크게 늘었다. 또한, IMF 시절에 명예퇴직과 실업의 고통을 산에서 해소했던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된 뒤에도 계속 산을 다니게 되었다. 부부끼리 등산을 즐기는 등 많은 여성들도 산을 찾게 되었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면서 건강과 미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자연스럽게 등산의류를 비롯해 용품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첨단 소재와 기능성에 대한 인식도 확산되었다. 그런데 등산복 등의 제품을 살 때 구매의 최종결정권자는 대부분 주부들이었다. 당연히 패션을 따지는 소비 패턴을 보여주게 되었다.

<2003년 FW 컬렉션>

<블랙야크 중국 공장>

아웃도어 산업으로의 시동

1990년대 말 등산의류가 새로운 패션시장으로 성장하자 대기업들이 또다시 앞 다투어 수입 브랜드를 도입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해외 명품 브랜드라는 홍보를 통해 소비자를 유혹했다. 1970년대 후반 해외 원정의 붐과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의 특수를 타고 수많은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뛰어들었던 전철을 다시 밟았다. 선경, 삼성, 대우 등 대기업들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등산용품 업계에 뛰어들었다가 대부분 실패를 맛보았다. 다품종 소량 생산, 노동집약적인 산업의 특징과 함께 등산용품에 대한 전문성 결여로 코오롱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번에 그들은 수입 브랜드의 도입을 통해 주로 등산의류에 주력했다. 아웃도어 상품이 전반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고속성장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열풍과 ‘아웃도어 라이프’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하나의 산업 장르로 성큼 성장을 해나갔다.
아웃도어 시장 규모는 2000년 3,110억 원에서 2003년 6,435억 원 규모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 동안 평균성장률 23%의 폭발적인 신장세였다. 소비자층은 일상생활에서 레저를 즐기는 모든 일반인으로 확대되었다. 웰빙 열풍과 주5일근무제 확대는 상당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한 아웃도어는 등산・레저용품 및 의류 등 전통적인 시장에서 벗어나 하나의 트렌드로 인식되면서 캐주얼웨어 등의 영역까지 침투했다. 전자제품 업체들은 MP3 플레이어 등 휴대용 전자기기에도 ‘아웃도어용 제품’을 잇달아 선보이는 마케팅을 벌일 정도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아웃도어 시장은 춘추전국시대에 다시 돌입했다. 국내 브랜드인 코오롱스포츠와 영원을 비롯해, 수입 브랜드인 노스페이스, 컬럼비아, 밀레, 몽벨, 아이더, 에이글 등이 전열을 가다듬고 뛰어들었다. 특히 골드윈코리아의 노스페이스는 새로운 럭셔리 브랜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순수 국내 브랜드인 에델바이스로 오랜 역사를 자랑해온 한고상사는 밀레를 독점으로 들여왔다. 1982년 메아리산악으로 출발한 에코로바도 에이글을 수입 판매했다.
또한 등산화로 출발했던 K2상사는 토털 브랜드로 변화를 꾀했으며, 1973년에 창업해 등산장비전문업체로 유명했던 동진레저는 기본과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부단히 생산했다. 블랙야크 브랜드 탄생 이후에는 아웃도어 시장에 적극 대응을 했다. 등산용 가스기구 전문업체인 코베아처럼 전문분야에만 집중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특히 아웃도어 시장에 있어서 원단이 가장 중요한 무기로 떠올랐다. 가장 각광을 받은 고어텍스와 고어코리아에서 선보이는 다양한 첨단 소재는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고어코리아에게 정식으로 공급받아 생산 및 판매하는 업체는 당연히 시장에서 선전을 펼쳤다. 블랙야크를 비롯해, 코오롱스포츠, 노스페이스, 컬럼비아, 에델바이스, 골드윈, 헤드, K2, 밀레, 프로스펙스, 영원, 아식스 등의 브랜드가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업체였다.
2003년부터는 노스페이스, 코오롱스포츠, 에코로바 등이 중국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국에 생산과 판매 네트워크를 가진 동진레저가 한발 앞서 있었다. 동진레저는 1993년에 중국 다롄에 생산 공장을 두었다가 철수한 뒤에, 1996년부터 톈진에 다시 생산라인을 가동시켰다. 1997년 10월 중국에 블랙야크 상표를 등록하였고, 1998년 1월부터 블랙야크 매장을 오픈시켰다. 이제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에 대한 국내 관심이 뜨거워졌다. 값싼 생산 비용 때문에 현지 공장을 짓던 곳인 중국이 어느새 세계 경제의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아웃도어 업체들은 백화점 입점에 이어 대형할인점과 가두시장에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차별화된 소재를 통한 기능성 웨어와 브랜드의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재래시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백화점과 할인점에는 아웃도어전문관이 설치되었고 각종 기획전 행사가 시즌마다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대리점이 전국에 우후죽순 개설되어갔고, 이어서 온라인쇼핑몰 등으로 유통 채널은 계속 발전했다.
2004년에는 LG패션이 라푸마를 도입했는데, 이와 같은 지명도 있는 브랜드가 속속 대기업 또는 중견기업들과 손을 맞잡았다. 이런 현상들이 가속화되면서 2004년에는 저가 기획상품의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다. 또한 50% 할인판매 등 시장에서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기획상품이 잘 팔리게 되자 너도나도 기획상품의 물량을 늘려나갔다. 패션을 접목한 아웃도어는 기능성 소재와 고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의류업계를 긴장시키는 강한 세력으로 거듭났다.

<2004년 제14회 상해 국제스포츠용품박람회>


산악단체의 활발한 해외 활동

서울시산악연맹 원정대는 새로운 미지의 원정지를 찾아 나섰다. 1998년 8월 31일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의 무크트파르바트(Mukutparbat, 7,130m) 정상에 올라 초등정의 대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듬해 인도 원정대에 의해 등정 의혹이 제기되고 말았다. 그 의혹을 스스로 규명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2000년 7월에 이번에는 강태선 단장이 15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이번에는 아비가민(Abigamin, 7,355m)과 무크트파르바트(7,130m)의 연속 등정을 노렸다. 결국 11명이 등정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돌아왔다. 또한 서울시산악연맹 원정대의 과거 등정이 착각에 의해 무크트파르바트가 아니라 무크트파르바트 이스트 Ⅱ봉에 올랐음을 밝혀냈다.

 

<2000년 한국 아비가민, 무크트파르바트 원정대>

<2000년 세계 7대륙 최고봉 원정대 발대식>

<2003년 서울・티베트 합동 에베레스트 원정대 발대식>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대한산악연맹은 ‘2000년 새천년맞이 기념사업’에 대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세계 7개 대륙 최고봉 정상을 모두 밟는 프로젝트였다. IMF 여파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주기 위해 기획된 사업이었다. 대한산악연맹의 부회장 7명이 7대륙 각각의 단장을 맡았다. 2000년 7월 강태선 단장을 비롯해 원정대 5명이 유럽의 엘브루스(Elburz, 5,642m) 정상에 올라섰다. 이외에도 ‘새천년・새희망 세계 7대륙 최고봉 원정대’는 남미의 아콩카과, 오세아니아의 칼스텐츠, 호주 대륙의 코시어스코(Kosciuszko, 2,228m), 아시아의 에베레스트, 북미의 매킨리,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남극 대륙의 빈슨매시프를 모두 등정했다.
2000년대 들어서 서울시산악연맹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 가운데에는 강태선 회장이 있었다. 그는 1986년 이사를 맡으며 첫 인연을 맺어, 1995년부터는 부회장, 2000년 1월 22일부터 회장의 짐을 지고 있었다. 강태선 회장은 옌벤 조선족 산악인들과 교류를 시작해 2001년 6월에 가맹단체 회원 102명을 이끌고 방문해 백두산 합동등반을 하였다. 2002년 6월에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Lasa)로 날아갔다. 그는 티베트등산협회(T.M.A.)를 방문해 상호 교류에 대한 의견을 서로 교환했다. 석 달 뒤에는 티베트등산협회 관계자들이 초청을 받아 내한해 우호결연 협정을 맺었다.
티베트와의 교류는 2003년 3월 30일 서울・티베트 합동 에베레스트원정대로 이어졌다. 강태선 대장이 19명을 이끌고 출정했다. 5월 21~22일 2회에 걸쳐 엄홍길 부대장 등 한국 5명, 티베트 4명, 셰르파 1명 등 총 10명이 세계 제1의 최고봉 에베레스트(티베트 말로는 초모랑마, Chomolangma) 정상에 올랐다.
야크를 이용한 전진캠프로의 짐 수송 등 지휘를 맡은 강태선 대장은 스폰서 역할까지 자처해 정신적・물질적 기둥 역할을 했다. 이 원정에는 중국 CCTV 방송팀까지 합류하기도 했다. 강태선 대장은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61일간의 시련과 사투 끝에 그 영광의 정점을 밟기까지의 모든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라고 말했다. 동진레저는 약 1억 원에 가까운 원정 지원을 하였다.

뉴밀레니엄 러시와 영광의 얼굴들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14좌 완등의 러시는 그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산악단체와 대학산악부, 단위산악회에서 출정하는 원정대의 대다수가 8,000m급 봉우리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였다. 2000년 한 해에만 동국대학교의 마칼루 원정,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 광주시산악연맹의 K2 원정 등 7개의 원정대가 8,000m급 등정에 성공했다. 2000년 10월 4일에는 45세의 김환구가 에베레스트 국내 최고령 등정자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의 대업을 달성한 엄홍길 대장>

<엄홍길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기념>


2000년 5월 19일, 칸첸중가 정상을 밟은 엄홍길은 뒤이어 7월 31일에는 K2에 올라 국내 최초이자 세계 8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의 대위업을 달성했다. 12년 동안 일궈낸 쾌거였다. 그러나 그는 1993년에 등정했던 시샤팡마에 대해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사진 증빙자료가 불명확해서 입증이 되지 않았다. 엄홍길은 “산악인 양심의 문제다. 왜 나를 못 믿느냐.”라고 항변하다가 재등정을 결정했다. 결국 그는 2001년 9월 21일 다시 시샤팡마를 올라 위대한 기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어 박영석도 2000년 7월 30일 브로드피크, 10월 2일 시샤팡마를 등정했다. 2001년 7월 22일 마침내 K2에 오르면서 히말라야 8,000m급 자이언트 14봉 완등 기록을 세웠다. 그는 8년 만에 대기록을 세웠다.
박영석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2년 7월 7일 유럽의 최고봉 엘브루스 정상에 오르고, 11월 24일 남극의 최고봉 빈슨매시프에 오르면서 14좌 완등과 7대륙 최고봉 등정을 모두 이룬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2004년 1월 13일에는 44일 만에 남극점을 밟았고, 2005년 5월 1일 775km를 걸어서 북극점에 도달했다. 전대미문의 ‘산악그랜드슬램(Grand Slam Expedition)’을 달성했다. 산악그랜드슬램은 지구 3극점 도달,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완등을 모두 이루는 것으로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화적인 기록이다.
한국에 낭보를 전해주는 산악인이 한 명 더 있었다. 2000년 7월에 K2 정상에 선 한왕용이 바로 그였다. 그는 2003년 6월 26일 가셔브룸 Ⅱ봉, 7월 15일에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라섰다. 그는 세계에서 11번째, 아시아에서 3번째, 한국에서도 3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는 9년 만에 신화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한왕용은 엄홍길과 3번, 박영석과 4번 정상에 함께 올랐다. 이제 대한민국은 14좌 완등자 3명을 보유한 세계 유일의 나라가 되었다. 최고봉이라고 해봐야 2,000m에도 못 미치는 나라에서 그것도 히말라야 진출 역사가 불과 40년밖에 되지 않는 나라에서 엄청난 신기원을 작성했다.
한국의 여성도 영광을 이어나갔다. 오은선은 2002년 8월에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를 시작으로, 2004년 12월 20일 남극의 최고봉 빈슨매시프를 등정하면서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