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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6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고난 속의 진군

귀감이 된 힐러리 경과의 만남

동진레저는 1997년 2월 블랙야크 등산의류에 듀폰의 쿨맥스(CoolMax)와 함께 고어텍스 원단을 접목시켰다. 명품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위한 발걸음은 계속 새롭게 시도되고 있었다. 또한 수입 브랜드인 마모트의 등산복을 의욕적으로 출시했다. 다른 브랜드들이 기능보다는 유행을 쫓아가고 있었는데, 본래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국내에 소개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우면서도 질긴 방수, 방풍 원단이 적용되었으며, 소매단 하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기능성의 척도인 제품이었다.
1997년 8월 29일,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한국에 왔다.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가 ‘77에베레스트원정대’의 에베레스트 등정 2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마련했는데,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초청 강연회와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다. 에베레스트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학교인 쿰부 힐러리스쿨의 학생 20명도 함께 초청되었다. 그는 고산 등반으로 인연을 맺은 히말라야에 보탬이 되는 헌신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형편이 극히 어려운 네팔을 위해 다양한 후원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산악인들과 다양한 교류를 하면서 폭 넓은 산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다.

<동진레저 매장을 방문해서 블랙야크 등산복을 직접 입은 에드먼드 힐러리 경>

<강태선 사장에게 금관을 선물받은 에드먼드 힐러리 경 부부>


힐러리 경은 8월 30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으며, 다음날인 8월 31일에는 부인과 함께 동진레저 본사와 매장을 방문했다. 강태선 사장의 요청에 그가 선뜻 응했던 것이다. 위대한 탐험가인 힐러리 경은 동진레저의 매장 및 제품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블랙야크 등산복을 선물로 받아 입어보면서 너무 좋아했다. 마치 현역 산악인으로 되돌아온 기분이 든다면서 활짝 웃었다. 힐러리 경은 “한국에 아름다운 산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그리고 등산장비가 이렇게 훌륭하게 생산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고 말했다.
그에게 선물이 또 하나 있었다. 강태선 사장은 신라의 금관을 기념품으로 준비했다. 18K 금관이었는데, 그는 한국의 왕이 된 것 같다고 즐거워했다. 힐러리 경과 환담을 나눈 강태선 사장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빈국인 네팔을 위해 교육과 의료, 자연보호 등의 봉사 및 후원 활동을 펼치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보면서 자신도 그런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러리 경은 “나는 세계 최고봉뿐만 아니라, 남극과 북극에도 모두 가보았다. 그러나 내 인생을 회고해보니 분명한 것은 높은 산의 정복이나 지구의 극지 탐험이 가장 값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사업은 히말라야에 사는 소중한 친구들을 위해 학교와 의료시설 등을 지으면서 운영하는 일과 그들의 아름다운 사원 등을 복구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라고 밝혔다.
숙연해진 강태선 사장은 힐러리 경의 삶을 귀감으로 삼겠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여비에 보태라고 소정의 봉투를 내밀었다. 그의 봉사를 위한 모금 활동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한편 힐러리 경이 2008년 1월에 사망한 이후 네팔 정부는 에베레스트 산과 가장 가까운 공항의 명칭을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을 기념해 텐징 힐러리 공항(Tenzing Hillary Airport)으로 바꾸었다.
한편, 약 1년 뒤인 1998년 9월에 강태선 사장은 산악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사업이 안정되면 청소년을 위한 사업을 펼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청소년수련원 운영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사회 환원으로 청소년수련원을 꼭 짓고 싶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연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성장해야 나라도 건강할 테니까요. 장소는 아무래도 제주도가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요. 고향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만한 환경도 국내에는 드무니까요.”라고 말했다.


IMF의 파도를 뚫고

1997년도 동진레저의 매출액은 42억 2,772만 원으로 전년대비 5.4%의 증가를 보여주었다. 영업이익은 1억 6,318만 원으로 전년대비 59%의 상당한 상승폭을 나타냈다. 그러나 당기순이익은 8,720만 원으로 전년대비 3.3%에 그쳤다. 국난인 IMF 외환위기를 맞아 그런대로 괜찮은 성적표였다. 곤지암 물류센터 건설로 인한 차입금이 경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봄에는 대한산악연맹의 안나푸르나와 칸첸중가 원정에 많은 지원을 하기도 했다.

<안나푸르나・칸첸중가 원정지원 물품들>

<동진레저백화점 시절 강태선 사장>


앞으로의 경영 상태가 가장 큰 문제였다.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형국이라 불황의 파도를 헤쳐나가는 것이 큰 과제로 떠올랐다. 20여 개의 외국업체와 수입 계약을 맺고 제품 수입에도 힘을 기울여왔는데, 이로 인해 엄청난 환차손까지 입은 상태였다. 한편, 시중에는 ‘토큰 산행’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IMF 때문에 궁핍해진 사람들이 토큰 하나로 버스를 타고 도시에서 가까운 산을 찾는다는 세태를 반영한 말이었다. 실직과 명예퇴직으로 산을 찾는 인구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들 대부분은 산에 대한 전문지식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산행 상식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운동화 한 켤레에 캐주얼 점퍼 차림, 추우면 모자 하나 둘러쓰고, 여기에 면장갑 하나 정도 끼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양복 차림으로도 산 밑에 나타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경영을 하기가 곤란했다.
1998년 1월 14일, IMF 여파 속에서 달러 때문에 해외 원정을 포기한 대신 설악산에서 훈련하던 산악인들이 폭설 때문에 일어난 눈사태로 8명이나 참사를 당했다. 그리고 7월 31일부터 8월 6일까지 갑작스러운 집중 호우로 인해 약 100명에 가까운 피서객과 산악인이 사망 또는 실종했다. 명예퇴직자와 실직자가 휴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산을 찾으면서 그와 비례해 산악 사고도 2.5배나 급증했다. IMF는 슬픈 상처를 여기저기 남겼다. IMF의 높은 파고를 넘기 위해 사회적으로 국산품 애용 운동도 일어났다. 지금까지는 거의 맹목적으로 외제 등산장비를 찾는 경향이 많았다. 외제병에 속앓이를 해온 국산장비 제조업체는 이미 외제를 능가하는 제품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등산장비 수입업체나 수입 자재에 크게 의존하던 생산업체들은 심각한 환차손 등으로 재정이 많이 악화되었다. 등산 인구가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용품시장은 구매력 위축으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든 업체들이 거품 빼기와 구조조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부산에는 1980년대 말에 약 200개가 넘던 신발업체들이 약 50개 안팎으로 줄어들었고, 국내 최대의 신발생산업체였던 화승마저도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1998년 3월 31일 화의 신청을 하고 말았다.
이런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동진레저는 블랙야크 뉴익스페디션 멤브레인 재킷을 내놓아 호평을 받았다. 좋은 제품은 누구나 알아보는 법이었다. 등산뿐만 아니라 스키나 산악자전거 등 격렬한 야외스포츠에도 고기능을 보여주는 제품이었다. 또한 듀폰의 서플렉스(SUPPLEX) 원단을 사용한 고기능 제품도 출시했다. 방풍과 통기성이 뛰어나 여름철 아웃도어 시장을 겨냥했다.
그런데 불황 속의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누가 어떤 제품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고 소문만 나면 모두가 금방 경쟁에 뛰어들었다. 오랜 기간 노력한 끝에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 업체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신제품 창조에 대한 의욕은 쉽게 꺾일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강태선 사장은 우직하게 밀고나갔다.
당시 등산장비 업계에서는 동진레저가 쓰러진다면 한국의 등산장비 업계에서 살아남을 회사가 별로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만큼 동진레저의 위치는 대단했다. 강태선 사장은 위기를 호기로 바꿀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종로와 동대문에서 탈피해 강남으로 진출하면서 등산장비 전문백화점으로 일대 변화를 꾀했던 그였다.
이제 블랙야크를 앞세워 많은 수출을 목표로 잡았고, 거대한 시장인 중국에도 심혈을 기울이기로 했다. 또한 새 브랜드의 탄생을 계기로 고품질의 차별화를 꾀했다. 프로자이언트가 대중적인 제품이라면, 블랙야크는 고기능성, 고품질의 제품으로서 시장을 공격적으로 공략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약 12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생업을 위해 결사항전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본사 개발실의 제품 개발에도 더욱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이럴수록 움츠러들지 않고 더욱 나서야 할 때라며 다른 기업들과는 반대의 전략과 목표를 세웠다. 주변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섬유 산업은 퇴조의 길에 빠져있었다. 어느새 배낭의 원단마저도 대만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다.
‘등산장비업체, IMF 이렇게 이겨낸다’라는 제목으로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강태선 사장은 “1998년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하루하루가 이렇게 어려운 적은 없었으니까요.”라면서 “IMF로 손해를 본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동안 완제품 수입에 한정돼오던 로열로빈슨, 맘모스, 라푸마 같은 제품을 우리가 직접 만들어 팔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로열티를 지불하는 조건이지만, 외국업체들이 우리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이해해주는 바람에 다른 나라의 업체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게 된 거죠.”라고 말했다.
또한 “미주, 유럽, 일본 시장을 뚫고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각각 그 지역의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막이 쳐져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중국은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장도 클 뿐만 아니라 같은 아시아권 국가끼리 하나의 시장을 형성해야 역으로 미주, 유럽의 공략을 막아낼 수도 있을 테니까요.”라고 강조했다.
강태선 사장은 더욱 공격적인 경영을 해나갈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능력 있는 직원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도 아낌없이 투자할 방침이었다. 그는 “이제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사업해서는 안 됩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투자를 아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상인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소비자의 입장에 선 경영을 펼칠 계획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품질 개선이 뒤따라야겠지요. 그리고 앞선 경영을 펼쳐 언젠가는 동진레저 제품들이 세계 시장에서도 누구나 선호하는 제품이 되게끔 할 겁니다.”라고 뜨거운 포부를 드러냈었다.


본사를 덮친 빗물

1998년 여름의 어느 날, 동진레저는 수재 피해를 입었다. IMF 위에 고통이 더해졌던 것이다. 빗물이 하수도로 내려가지 못하고 맨홀 뚜껑 위로 역류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지하와 1층 매장에 있던 많은 상품들이 물에 젖었는데 흙이 뻘처럼 같이 묻어버렸다. 이 제품마저 버린다면 동진레저는 IMF 외환위기 속에서 좌초할 수밖에 없는 위급한 형편이었다.
비상연락망으로 소집된 모든 직원들은 한마음으로 뭉쳐 모든 제품을 곤지암물류센터로 옮겼다. 그곳에는 커다란 드럼통을 수십 개 마련해놓고 모두가 손빨래를 했다. 강태선 사장의 부인 김희월 여사는 물론 자녀들도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나중에는 손이 모자라 동네 아주머니들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했다. 오전에만 정상 근무를 하고, 오후에는 모두 곤지암으로 달려갔다. 드럼통에 담긴 물에 제품을 빨고 말리는 일은 약 보름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생각보다 많은 제품들을 건져냈다. 정상적인 제품 수준에 도달한 것들은 할인판매로 소화를 시키고, 판매가 곤란한 상태인 제품은 불우이웃돕기로 강남구청에 기증을 했다.
종로시절에 화마가 덮쳐도 우뚝 일어선 동진레저의 저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힘을 모으면 안 될 것이 없다는 현장을 모두가 체득했다. 본사 신축과 곤지암물류센터 신축 때에도 물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런 일은 그 후로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소소하게 때로는 이번 일처럼 심하게 물난리를 2005년 제헌절에 겪기도 했다. 그 일대 배수펌프시설이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진레저는 이렇게 어려운 역경과 IMF 외환위기 때문에 계속 성장하던 그래프가 꺾이고 말았다. 1998년도 매출은 25억 4,687만 원으로 전년대비 무려 -40%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거머쥐었다. 여태껏 상승을 하지 못했던 해는 없었다. 그래도 영업이익은 1억 8,822만 원으로 전년대비 15.3% 성장하면서 분전을 했다. 당기순이익은 6,150만 원으로 전년대비 -29.5%의 기록을 남겼다. 굴지의 회사들도 쓰러지는 마당에 이 정도면 선전을 펼친 것으로 긍정적인 해석을 하고, 다음해에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오르겠다는 경영 의지를 불태웠다.


남북경협과 금강산 관광

1994년 11월 정부의 남북경제협력 활성화 조치로 인해 핵문제로 중단되었던 대북관계가 급진전하고 있었다. 이 조치는 기업인 방북, 소규모 투자, 사무소 허용 등을 담고 있었다. 이후 남북경협은 재계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편, 강태선 사장은 히말라야나 알프스 등을 누비면서 아쉬운 곳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이었다. 그곳의 산을 직접 밟고 싶은 소망을 항상 갖고 있었다. 남북경협의 터진 물꼬 속에서 그는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섰다. 역시 그의 무모한 모험에는 반응이 돌아왔다. 중국의 투자회사를 통해 베이징에서 북한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통일부와 안기부의 허가까지 받아냈으며 안기부는 추후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그 자리에서 북한 경제의 정보도 듣고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결국 일이 성사되어 의류 제품 가공을 북한에 맡길 수 있게 되었다. 명심합작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드디어 인천항에서 북한의 남포항으로 원부자재를 보냈다. 평양 부근에 위치한 공장에서는 등산조끼 등의 의류를 생산했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전화나 팩시밀리를 넣으면서 일을 추진했다. 약 2년 동안은 정부의 요구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추진하다가, 이후 정부에서 공식화시켜주었다. 외부에 공식화된 시점이 1998년 1월 21일이었다.
북한에서는 조끼, 바지, 남방 등을 주로 생산했는데 보이스카우트 단복도 생산을 했다. 그런데 보이스카우트 단복에 부착하는 태극기 때문에 서로 말썽이 생겼다. 태극기를 달아줄 수 없다는 북측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결국 국내에서 태극기를 마지막으로 부착 가공하는 에피소드를 겪었다.

<남북경제협력 위탁 가공 사업 계약서>


북한과의 경제협력은 여러 문제가 있었다. 생산 제품의 품질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항상 납기일을 지키지 않아 애를 태웠다. 그리고 원부자재를 여유 있게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모자란다고 이야기했다. 생활필수품이 부족한 형편이라 원부자재가 계속 사라졌던 것이다. 직접 가서 확인할 수도 없는 기막힌 노릇이었다. 많이 소요되는 원부자재와 납기를 못 맞추는 일 등으로 이익이 날 수는 없었다. 중국의 조선족이 평양으로 들어가서 제품을 싣고 나온 뒤, 제품들을 검수 확인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멀기만 했다. 그리고 강태선 사장의 원래 목적인 북한의 산하를 밟는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한편, 남북경협의 최고 이슈인 금강산 관광이 무르익었다. 사실 금강산 관광은 산악교류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고 접촉했으니,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다.
1997년 7월 18~29일 서울시산악연맹 소속의 등반기술연수팀 3명이 중국 베이징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북한의 남자 3명과 여자 3명을 연수시켜주는 일이었다. 북한은 남한에게 직접 교육받기를 꺼려했는데, 티베트의 10여 명과 베이징청년단 선수들도 같이 연수받기로 하면서 일이 성사되었다. 북한에서 연수교육을 받으러온 사람들은 체육교사와 특수부대 교관들이었다.

<북한 구조대 암벽강의>

당시 북한은 아시아산악연맹(UAAA)과 국제산악연맹(UIAA)에 가입하려고 했는데, 우리 등산단체들이 나서서 적극 돕고 있었다. 이런 관계 유지 덕분에 북한등산협회가 등반기술의 전수를 요청했다. 당시 강태선 사장은 서울시산악면맹 부회장의 자격으로 중국에 들어가 북한에서 온 연수생들을 만나 격려했다. 북한과의 이런 교류가 바탕이 되면서 마침내 금강산 등반이라는 꿈이 영글게 되었다.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의 날이 밝았다. 1998년 11월 18일 오후 6시, 현대금강호가 동해항에서 출항을 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을 비롯한 임직원들과 관광객 880명, 승무원 420명 등이 승선했다. 북으로 가는 뱃길은 멀기만 했다. 무려 14시간이 소요되는 지루한 여행이었다. 그래도 배는 화려하게 준비되었다.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들이 갖춰졌다. 그 시설 중에는 아주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동진레저의 매장이었다.

<현대 금강호에 설치된 동진레저 매장>


이는 동진레저의 기막힌 제안으로 이뤄졌다. 관광객들이 금강산을 오르는데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들을 챙길 수 있는 일이었다. 등산장비전문업체의 매장은 홍보 효과도 누릴 수 있었다. 과거 현대자동차 침낭 납품으로 이어진 현대와의 인연은 그렇게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에 남모르게 애쓴 강태선 사장의 공이 돌아온 셈이기도 했다. 역사적인 뱃길에 동진레저는 그렇게 함께 했으며 동진레저의 제품은 그렇게 북한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강태선 사장과 그를 수행한 동진레저의 직원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금강산 관광에 투입된 봉래호 등 다른 배에도 동진레저 매장이 모두 설치되었다.
이후, 금강산 관광 붐은 레저 스포츠업계 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등산장비 업체와 아웃도어 업체들은 금강산 관광 기념 할인판매 등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금강산 관광을 추진한 현대아산은 관광객들의 조난과 안전사고에 대비해 산악구조대원 파견을 요청했다. 서울시산악연맹 부회장이었던 강태선 사장은 적극 협조했다. 그래서 서울시산악조난구조대 3명이 현대아산에 채용되는 형식으로 현지에서 파견근무를 시작했다.


남대문이 활짝 열리다

동진레저는 1998년 중국의 유명대학인 칭화대학교(淸華大學校)의 원정등반대를 지원했다. 중국의 대학생들과 산악계 발전을 위한 일에도 앞장을 섰던 셈이다. 또한 동진레저는 설악산국립공원과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다양한 지원과 협조를 해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동진레저의 신제품은 나날이 발전을 해나갔다. 1999년 4월에는 고어의 액티벤트(Activent) 원단이 적용된 제품을 출시했다. 방수, 방풍은 물론 훨씬 뛰어난 투습성으로 조깅이나 사이클, 산악자전거 등과 같이 땀을 많이 흘리는 활동적인 상황에서도 땀을 신속하게 배출하는 제품을 내놓았다. 이어서 블랙야크 고어텍스 등산화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불량률 0.01%의 철저하고 엄격한 관리를 받는 제품의 탄생이었다. 수만 번의 각종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하고, 심 테이핑(Seam-Taping) 과정과 방수처리 확인 공정, 최종적으로는 원심력 테스트까지 거친 뒤에 매장에 나갔다. 지독한 품질을 고집했던 셈이다.
1999년 4월 1일, 전문 산악인을 위한 이색적인 카드가 국내 최초로 나왔다. 동진레저는 삼성카드와 제휴를 맺고 ‘동진레저 삼성카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동진레저는 매출 신장과 함께 우수 산악인을 위한 발전기금 조성, 전문등반보험 개설에 초점을 맞추었다.
강태선 사장은 “한 사람이 1억 원을 기부하려면 어렵지만, 수만 명이 십시일반하면 쉽습니다. 꼭 동진레저 매장에서 장비를 사라는 것도 아닙니다. 악우들끼리 술을 마시든 식사를 하던지, 이 카드로 결제하면 산악발전기금이 자기도 모르게 적립되고, 그만큼 산악계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동진레저 남대문점 오픈>

<동진레저 삼성카드 설명회>

강태선 사장은 해외 원정 협조, 스포츠클라이밍 발전, 산악유공자 자녀 돕기 등에 우선적으로 기금을 사용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3개월 무이자 할부 혜택, 최고 1억 원 휴일상해보험 무료 가입, 이용금액의 0.1% 우수산악인발전기금 조성, 현금 같은 포인트 적립, 쌍용정유 1리터당 20원 할인, 롯데월드 등 특별가맹점 할인서비스 등 풍성한 내용으로 기획된 카드였다. 또한 연간 누적금액에 따라 동진레저 상품권 증정, 히말라야 티켓 또는 네팔 왕복항공권 1매 증정이라는 놀라운 보너스도 있었다.
동진레저는 “남대문이 활짝 열렸습니다.”라는 광고를 집행했다.
1999년 7월 15일, 동진레저는 남대문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동진레저 남대문점이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3가 3-94에 오픈을 했다. 종로점, 강남 본사 매장에 이은 세 번째 경사였다. 보통 동대문 출신은 남대문에 들어가기가 힘들었고, 또한 남대문 사람이 동대문에 진출하기 어려운 일종의 시장 법칙이 존재했었다. 강태선 사장은 그 벽을 넘어섰다. 그렇게 진출하고 싶었던 남대문에 이제 거점을 두게 되었다.
한편, 신세계백화점은 동진레저와 함께 1999년 10월 29일 신세계스포츠전문관 10주년 축하기획으로 ‘단독! 동진레저 블랙야크 기획전’을 개최했다. 10월 30일에는 히말라야 거봉 12좌를 등정한 엄홍길의 팬 사인회도 열렸다. 이에 앞서 엄홍길은 1999년 6월 17일에 코오롱스포츠와 원정 후원 계약을 체결했다. 14좌 완등을 코앞에 두고 스폰서를 잡았던 셈이다. 그는 강태선 사장과의 친분과 의리 때문에 이런 계약을 맺은 뒤였지만 동진레저 행사에도 참석을 해주었다.
동진레저는 1999년 12월에 강원도세계잼버리수련장과 암벽등반장비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과거 세계잼버리대회장 터에 수련장이 들어섰는데, 이곳에 자일, 안전벨트, 카라비너, 안전모, 하강기 등을 공급하게 되었다.
새천년을 목전에 둔 동진레저는 1999년도 매출을 35억 2,554만 원으로 마무리했다. 지난해에 비해 38.4%나 성장했다. 공격적인 경영과 금강산 관광 등 여러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업이익은 1억 9,524만 원으로 전년대비 3.7%로 소폭 상승했다. 당기순이익은 7,768만 원으로 전년대비 26.3%나 올라갔다. IMF의 높은 파도를 견뎌낸 결과였기에 어느 때보다 눈물 나게 값진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