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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6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터널의 시대 (1996-1999)

유통시장 변화의 파도


1990년대 초・중반, 한국의 유통시장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섰다. CVS(편의점, ConVenience Store)라는 24시간 소매 형태가 1990년 국내에 처음 진출을 한 뒤 불과 몇 년 만에 돌풍을 일으켰다. 1993년 7월 1일부터 3단계 유통시장개방계획에 의해 외국 대형유통업체의 국내 진출도 대폭 확대되었다. 이로써 영세한 중소유통업체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유통시장 개방 이후, 미국의 회원제 창고형 할인점인 프라이스클럽이 1994년에 국내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미국에서 월마트와 쌍벽을 이루는 대형유통회사의 출몰이었다. 최저의 가격으로 질 좋은 상품을 공급한다는 외국 유통업체의 새로운 전략은 시장에 디스카운트 바람을 몰고 왔다.

<3단계 유통시장개방 보도기사 (1993년 1월 10일 동아일보)>


국내 대기업들도 이에 맞대응을 해나갔다. 신세계백화점이 1993년 ‘이마트’로 유통시장에 깃발을 먼저 꽂았으며, 농협중앙회도 1994년 ‘농협하나로클럽’을 열었다. 1996년에는 유럽 최대의 유통업체인 ‘까르푸’가 국내에 상륙하게 되었다. 국내 백화점업계 1위인 롯데백화점도 이에 뒤질세라 1997년에 ‘마그넷’을 개점했다. 이어서 1998년에는 유통의 고질라로 알려진 미국의 ‘월마트’까지 국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영 합작으로 삼성테스코가 1999년 출범하면서 유통 전쟁의 시대가 가속화되었다. 이제 유통시장은 무한 경쟁, 가격 파괴의 현장이었다. 백화점과 할인점이 결합되는 복합쇼핑몰이 등장했고, 불황 속에서 소비자들은 가격 파괴의 대형할인점으로 몰려들었다. 국내 유통시장은 거대한 덩치들끼리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장소였고, 중소상인들은 설 자리를 차차 잃어갔다. 이렇게 재편되는 유통시장 속에서 제조업은 물론 서비스업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물론 등산장비 및 용품업계도 많은 변화를 요구받았다.
또한 해외 유명 브랜드의 국내 직접 진출도 크게 증가되었다. 소득 증가로 인해 소비자의 욕구는 명품과 고기능성을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백화점의 매장은 명품이 점령하였고, 중산층 이하까지 덩달아 명품을 소비하는 행태가 일어났다. 할인매장과 같은 절제와 실용주의, 그리고 명품 선호 취향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중적인 소비가 새로운 풍속도였다.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기능과 새로운 디자인, 그리고 고품질과 고기능으로 소비자 만족에 나서야만 했다.
등산장비 업계는 1990년대 중반부터 고기능성 등산복과 등산화 등으로 눈부시게 변모했다. 고어텍스 원단 적용 제품이 무더기로 출시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제는 ‘질 좋고 값이 싸거나, 질 좋고 비싸면서도 갖고 싶은 브랜드이냐.’라는 갈림길에 있었던 것이다. 아주 비싸든지 아예 싸든지, 소비가 양극화 현상을 보였기에 잘 대응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명품 선호는 반짝 유행이 아니라, 경제적 여유가 조금 생김에 따라 품위를 갖추고 싶은 욕구의 산물이었다.

세계화 추진 속의 비극

1993년 12월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로 세계 시장은 개방화와 국제화의 급물살을 탔다. 1994년 1월에는 유럽연합(EU)이 탄생하고, 북미에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었다. 이제 경제 블록화가 나타나면서 보호무역주의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무역장벽이 갈수록 높아지고 국제무역은 갖은 통상마찰을 빚었다. 1995년 1월 세계무역기구(WTO)가 공식 출범하고, 이제는 무제한의 경쟁시대가 도래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


한편, 1993년에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Globalization)’를 주창하면서 본격적인 국제화와 개방화 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1995년 6월에 지방자치제 실시, 7월부터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등으로 신경제 계획을 추진했다.
한국 경제는 1995년도에 1인당 국민총소득(GNI) 1만 달러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나날이 신장되는 국력의 자신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까지 추진했다. 1996년 12월 12일, 마침내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인 두 번째로 OECD 정회원국이 되었다. 이후 시장개방의 문호는 더욱 넓어져만 갔다. 경기가 더욱 살아나는 분위기로 보였고, 곧 선진국 진입이라는 이름표가 붙게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그 그림자를 전혀 보지 못하면서 자신감이 넘쳤다. 한국 경제의 실상은 1994~1996년도 3년 연속으로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1996년도 무역수지는 2억 3,120만 달러 적자로 사상 최악의 기록이었다. 이전까지 있었던 최대 적자 규모의 약 3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1997년 1월부터 한보철강을 필두로 해서 삼미, 진로, 뉴코아, 기아자동차 등 굴지의 대기업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1997년 10월 28일 주가지수 500선이 붕괴되었다. 이때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라는 보고서까지 발표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1997년 11월 10일 대미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1,000원대를 넘어서면서 부총리로부터 그 심각성을 처음 보고받았다. 이제 대한민국 금고에는 달러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1997년 12월 3일, 마침내 정부는 IMF 총재와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을 했다.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면서 경제주권을 넘겨주게 되자 국민들은 당혹스러웠다.
국민들은 대량 해고의 아픔을 맞보았고, 경기 악화로 인해 수많은 기업들이 사라져버렸다. 외환 부족으로 말미암아 30%가 넘는 살인적인 고금리와 얼어붙은 자금 흐름, 명예퇴직과 실업이라는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면서 한국 경제는 어두운 터널로 깊숙이 들어갔다.
1994년 803.62원이었던 달러는 1997년에 951.11원으로 마감되었고, 1998년에는 1,398.88원이 되었다. 실업률은 1995년 2%에서 1998년 7%로 치솟았다. 주가지수는 1994년 965.7포인트였는데, 1998년 406.1포인트로 추락했다. 유가는 1997년 리터당 769.20원이었는데, 1999년에 1,112.43원으로 올라섰다.

<한보철강 부도관련 기사(1997년 1월 25일 동아일보)>

 

<IMF 구제금융 협상타결 발표>


피를 말리는 외환 유동성 확보에 매달리는 사이에 외국인들이 주식시장을 점령했고 알짜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서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금융구조조정,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연일 분주하게 움직였다. 5대 그룹 간에 빅딜을 통해 핵심 사업을 재편시켰다. “구조조정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에 넣을 수 있다.”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압박을 통해서 마무리했다.
1999년에는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국면에 들어갔다. 하지만 세계경영의 꿈이 무너진 ‘대우 사태’로 인해 대우그룹에만 쏟아 부은 돈이 1조 원에 달했다. 고유가와 고금리 때문에 기업들의 수익성은 악화 일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한편, IMF 체제는 고용시장에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급여와 호봉은 연봉이라는 말로 급속히 대체되었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대거 양산되었다. 한국은 1996년에 1인당 GNI가 1만 2,197달러였는데, 이 숫자를 회복하는데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등산・레저의 다양화 물결


1990년대 중에서 1995년이 비운의 해였다. 유럽의 알프스, 히말라야, 미국의 요세미티(Yosemite) 등지에서 각종 조난 사고로 많은 산악인을 잃었다. 사고 원인을 조사 및 연구하는 노력과 자세들이 필요했다. 등정에 실패한 팀, 특히 사고를 당한 팀은 자신들의 등반 과정을 숨기려 하는 풍토였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숨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도 큰 문제였다.
한국의 산악문화가 이런 맹점을 가졌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더욱 다양해지면서 풍성해졌다. 먼저 산악스키라는 장르를 다시 부활시키기 시작했다. 약 30년 만에 산악스키가 되살아났다. 주로 해외 원정을 다녀온 알피니스트를 중심으로 겨울등반에 산악과 스키를 접목시켜 즐기는 추세가 나타났다. 스키장 시설도 늘어나 레저 스포츠로 스키에 빠지는 인구도 많이 증가되었다.
그리고 스포츠클라이밍도 활성화 되었다. 전국스포츠클라이밍대회가 열린지 약 10년 만에 남자부에는 이재용, 여자부에는 고미영이라는 걸출한 선수들이 배출되었다. 암벽등반은 매우 위험하고 힘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품질 좋은 국산 장비의 개발과 보급, 등반 기술의 발전 등으로 암벽등반 인구는 날로 늘어났다. 또한 겨울에 빙벽을 즐기는 산악인도 갈수록 늘었고, 빙벽 등반 기술도 날로 향상되었다.
또한 사계절 스포츠로서 인공암벽이 독립적인 종목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1988년 5월 살레와스포츠가 인공암벽을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 이후, 1990년 5월에는 대한산악연맹 주최로 인공암벽 첫 레이스가 펼쳐졌다. 뒤이어 6월에는 상금이 걸린 인공암벽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산에까지 가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어서 직장인들 사이에서 생활체육으로 인기를 누렸다. 1996년에 전국의 암벽등반 동호인클럽은 약 5,000여 개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국 각지의 크고 작은 실내인공암벽은 약 3,000여 개로 꼽혔다.
1994년 이후, 산악자전거(MTB, Mountain Bike)에 대한 관심도 크게 늘어났다. 1989년 국내에 처음 보급된 MTB는 동호인이 대략 3,000여 명에 이르렀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MTB는 활성화의 계기를 잡았다.
이와 함께 산악마라톤이라는 장르도 많이 활성화되었다. 1994년 9월 국제산악마라톤대회가 국내 최초로 개최되었으며, 이후 일반인이 참가하는 각종 산악마라톤대회가 계속 생겨나고 산악인들의 축제로 자리를 잡아갔다.

<1996년 제4회 서울산악마라톤대회>

 


1990년대 중반 이후 차와 함께 떠나는 오토캠핑족도 크게 늘었다. 남대문시장 레저용품 전문상가는 등산장비를 비롯해, 이제는 오토캠핑용품, 수상레저용품 등 품목이 더욱 다양해졌다.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레저를 즐기게 되면서 오토캠핑에 맞는 야영장비가 속속 출시되었다. 장비는 대형화와 다기능화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한편, 한국등산학교가 1994년에 개교 20주년을 넘어섰고, 이곳에서 4,600여 명의 클라이머가 배출되면서 산악 저변이 크게 신장되었다. 국립공원도 1994년 이후부터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자연휴식년제를 선의 개념에서 면의 개념으로 바꾸어 등산로 이외의 장소에서 있었던 자연훼손을 더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기간 설정도 탄력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동진레저 제14회 스포츠클라이밍대회 후원>

 
1995년 3월 한국대학산악연맹이 한국산악문화회관에 한국산악박물관을 개설해 산악문화의 풍성함을 더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피켈 등 역사적인 장비와 함께 산악서적, 등반사진, 등산우표, 배지 등을 전시했다. 산악문화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1996년 9월 국내 최초로 산악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각종 서적과 등반계획서, 비디오 등을 소장해 산악인들의 정보센터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등산출근’이라는 말이 새로 생겨났다. 외환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슬픈 단어 중에 하나였다. 실업자와 명예퇴직자들이 대거 양산되면서 갈 곳 없는 그들은 서류가방이나 신문을 몇 가지씩이나 손에 들고 또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산으로 향했다. 차마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한 그들은 산으로 출퇴근하는 산악인이 되어버렸다. 이런 와중에 1997년 5월에는 한국 최초의 산악드라마 <산>이 제작되어 MBC에서 방송을 타기도 했다.
분단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대북 관계가 좋아지면서 1998년 11월 18일 오후 6시부터 4박 5일 일정의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실향민과 산악인들은 금강산에 오르려고 동해항에서 배를 탔다. 꼬박 14시간여 동안 배를 타고 북녘 땅에 발을 디뎠다.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금강산은 감격 그 자체였다.

 

기록과의 경쟁


1996년 10월에 대한산악연맹은 중국등산협회와 합동으로 충모강리(窮母崗日, 7,048m)와 릉보강리(冷布崗日, 7,095m)에 세계 첫 등정의 신기원을 작성했다. 아직까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전인미답의 험산을 두 나라의 산악인이 힘을 모아 등반한 뜻깊은 일이었다. 유럽과 일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한국에 등반 허가를 내준 일은 양국 산악인들의 협력관계 덕분이었다. 1994년 6월 중국등산협회는 외국의 등산단체와는 최초로 대한산악연맹과 우호협력조약을 맺었다. 그동안 세계의 산악인들은 네팔을 통해서만 히말라야에 오를 수 있었으나, 이제는 히말라야의 거봉들을 중국 쪽의 새로운 루트로 남보다 먼저 밟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중국등산협회와의 교류>


1996년 5월 1일 ‘작은 탱크’ 엄홍길은 다울라기리 Ⅰ봉을 등정했고, 이어서 9월 22일에는 마나슬루에도 올랐다. 히말라야 14개 거봉에 대한 도전은 거침이 없었다. 박영석도 1996년 5월 3일 안나푸르나 Ⅰ봉(8,091m)에 올랐다.
1997년 봄, 대한산악연맹 소속으로 안나푸르나에 도전한 강태선 대장, 엄홍길 등 일행은 셰르파 1명이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하면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어서 5월에는 세계 3번째 최고봉인 칸첸중가(Kanchenjunga, 8,586m)에 도전했으나 8,300m에서 아깝게 발길을 되돌려야만 했다. 같은 루트로 등반한 외국 등반대가 텐트에 놓아둔 식량과 장비를 가져간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정상 공격 때 식량과 장비가 부족했다.
1997년 4월 27일에는 다울라기리 Ⅰ봉에 박영석, 한왕용이 등정을 했다. 뒤이어 5월 18일에는 허영호가 초오유에 등정했고, 1997년 가을에 박영석도 이곳 정상을 밟았다. 엄홍길 역시도 1997년 7월에 가셔브룸 Ⅰ봉(8,068m)과 가셔브룸 Ⅱ봉에 등정하면서 한국 산악인끼리 경쟁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때 가셔브룸 Ⅱ봉에는 여성 산악인의 샛별로 떠오른 오은선도 등정을 했다. 1997년에 한국산악회는 가셔브룸 Ⅳ봉(7,925m)의 서벽 중앙립으로 초등 기록을 세우면서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가셔브룸 II봉 정상의 오은선>

<1997년 안나푸르나・캉첸중가 원정대의 등반 모습>

1997년 10월 18일 박영석, 한왕용 두 산악인이 로체 정상에 올랐다. 특히 박영석은 한 해 동안 5개의 봉우리를 연속으로 정복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7개월 만에 일궈낸 대기록이었다. 1996년에 멕시코의 카를로스 카르솔리오(Carlos Carsolio)가 세운 한 해 4개 봉우리 연속 등정의 기록을 경신해 세계 산악계가 놀라고 말았다. 이제 박영석은 거봉 7좌의 등정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엄홍길의 10좌 등정 기록을 바짝 뒤쫓았다. 이제 14좌 완등을 누가 먼저 달성하느냐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8,000m급 거봉을 향한 경쟁은 사회적 흥미와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산악계는 크게 고무되었다.
1998년 4월에 시샤팡마를 오른 박영석은 6개 봉우리 연속 등정의 기록을 이어나갔다. 7월에는 박영석과 한왕용이 낭가파르바트에도 올랐다. 이제 박영석은 14개 중에 8개, 한왕용은 7개를 등정했다. 이어서 박영석은 12월 6일 마나슬루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1998년 7월 22일에는 지현옥이 세계 최초로 여성 무산소 등정 알파인 스타일로 가셔브룸 Ⅱ봉에 올랐다. 한국 여성이 강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이었다. 1993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그녀는 1997년에 가셔브룸 Ⅰ봉도 등정했기 때문에 3좌 등정의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안나푸르나 정상에 선 엄홍길>


1999년 4월 29일, 엄홍길 대장은 안나푸르나 Ⅰ봉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1998년 4월 이곳에서 골절상을 입어 수술대에 올랐었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재기해 다섯 번의 도전 끝에 비정한 안나푸르나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이때 같이 정상에 서면서 4번째 등정 기록을 세운 독보적 여성 산악인 지현옥이 하산 길에 그만 실족사를 당하고 말았다. 슬픔을 딛고 엄홍길은 1999년 7월 12일에 낭가파르바트 등정 성공으로 12번째 기록을 세웠다. 이때 MBC는 한국 TV카메라 역사상 최초로 8,000m 봉우리를 등정해 촬영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제 엄홍길 대장은 12좌 등정으로 단 두 곳만 남겨놓게 되었다. 한편 박영석은 1999년 5월에 칸첸중가에 올라 10개의 기록으로 뒤를 쫓았다. 이외에도 한국 산악계에는 이색적이면서 감동적인 기록도 많았다. 1998년에 장애인 김홍빈이 세계 5대륙 최고봉 도전의 출사표를 던져 남미의 아콩카과(Aconcagua, 6,962m)와 북미의 매킨리를 등정했고, 12살에 불과한 어린이 김영식이 1998년 6월 27일 매킨리 최연소 등정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98년 3월에는 박영석 등반대장과 셰르파의 도움으로 1급 시각장애인 2명이 히말라야 아일랜드피크(6,160m) 정상을 밟았다. 1999년에는 조형규가 무려 51세의 나이로 가셔브룸 Ⅱ봉에 올라 8,000m급 한국 최고령의 기록을 수립했다. 이렇게 한국 산악인들의 인간 승리와 도전은 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