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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6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높이 오른 동진레저의 깃발

악조건 속의 성장

동진레저백화점 첫 영업 년도의 실적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값진 결과를 거두었다. 1990년도 매출액은 6억 9,819만 원이었다. 영업이익은 865만 원이었고, 당기순이익은 531만 원이었다. 아직은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강소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한 힘찬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법인으로 한 단계 발전하고 압구정에 사옥을 신축하면서 세무당국으로부터 관심을 얻게 되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세무조사가 들이닥쳐 직원들은 야단법석이 났다. 수십 명이 한 번에 조사를 나와 직원들은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어느 직원은 두세 시간 정도 조사를 받으면서 일곱 주전자의 물을 비웠다.
반면에 강태선 사장은 너무나 의연했다.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라는 편안한 표정이었고, 혹시 문제가 생겨도 당당하게 해결하면 된다는 자세였다. 그의 느긋한 대처에 직원들의 동요는 가라앉게 되었다. 직원들은 강태선 사장의 성격이 별로 침착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큰일 또는 어려운 일, 힘든 일이 닥쳐왔을 때 차분하고 냉철한 모습을 새롭게 발견했다. 역시 리더의 존재답다는 점을 깨달았다. 힘든 세무조사를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받았는데, 항상 차분한 태도와 자세로 맞이했다.
한편, 동진레저백화점의 제품은 갈수록 다양해졌으며, 국내 최초로 더블식스(Nylon-66) 원단 등을 적용해 나갔다. 산악인의 입장에서 착용감을 개선하고 구조적인 기능 등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전문가용 텐트, 거위 털(Goose Down) 방한 조끼와 침낭, 신소재인 폴라플러스(Polar Plus) 재킷, 울(Wool) 소재의 등산바지, 특수 원단의 오버트라우저즈(Over Trousers), 암・빙벽 전문 클라이머를 위한 안전벨트(Sit Harness)와 클라이밍 타이즈(Tights), 가스램프와 버너, 수통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프로자이언트 제품들로 경쟁업체들과 맞섰다.

<1990년 12월 동진레저백화점 상품 광고>


이런 제품들을 바탕으로 1991년도 동진레저백화점의 실적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매출액은 11억 5,085만 원을 거둬 전년대비 65%라는 놀라운 성적표를 거머쥐었다. 취사야영금지의 늪에 빠져 풍비박산이 난 동종업계와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영업이익은 2,469만 원으로 전년대비 약 3배에 가까운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당기순이익도 1,049만 원으로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증가를 나타냈다.
1992년 여름 시장에서는 텐트 업체들이 시장 선점을 하기 위해 뜨거운 공방전을 벌였다. 국제상사, 화승, 코오롱 등 대형회사 이외에 진웅, 반포산업, 신양 등 수출전문 업체들이 내수 시장 참여를 본격화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수출이 둔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동진레저와 에코로바 등 중소업체들도 시장 분할을 위해 고군분투를 벌였다.
당시 텐트업체는 약 50개 업체에 육박할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88서울올림픽과 1991년 세계잼버리대회 등을 거치면서 국내 레저 문화가 크게 성숙되었기 때문이다. 텐트 시장 규모가 매년 10% 이상 늘고 있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하고 많은 업체들이 뛰어들었다.
그런데 대기업들의 등산장비와 용품은 산악인들에게 품질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라는 평을 들었다. 1980년대에 선경과 반도상사, 제일모직, 제일합섬 등은 그래서 몇 년 버티질 못하고 사라졌었다. 무엇보다도 등산시장 진출을 쉽게 생각한 측면도 있었다. 대부분 말로만 인체공학을 운운했지, 몇 개의 샘플 중에서 조금 나아보이는 것을 대강 골라 하도급을 주어 생산하는 풍토였다. 또한 소규모 업체에게 도급을 주니 단가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제품을 개발,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전문 산악인의 지식과 경험이 녹아있는 제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92년도 동진레저백화점의 매출액은 12억 8,932만 원으로 전년대비 12%의 성장세를 이어나갔다. 치열한 쟁탈전 속에서 일군 땀내 가득한 결과였다. 영업이익은 2,983만 원, 당기순이익은 1,549만 원으로 전년대비 각각 21%, 48%의 상승세를 나타냈다. 법인으로 전환된 뒤에도 동진레저는 꾸준한 신장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많은 부침이 있는 업계 현실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전문 메이커의 힘이었다. 남처럼 유행에 따르기보다 기본에 충실한 존재의 무게감이었다.

까반의 탄생

‘프로자이언트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다!’
‘아웃도어 라이프’와 ‘알파인 투어링(Alpine Touring)’을 가꿔가는 프로자이언트의 광고문구이다. 여기에는 ‘레저토피아’ 세상을 선도하겠다는 기업의 의지와 경영 철학이 담겨져 있었다. 이런 프로자이언트와 함께 1992년부터 ‘까반(Cabane)’이라는 브랜드가 새롭게 선을 보였다. 또한 광고에서는 ㈜동진레저백화점 대신에 공장으로 등록된 ㈜동진레저의 이름이 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까반은 프랑스어로 오두막이라는 뜻이었으며, 스위스어로는 산장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자이언트에서 보다 더 실용성과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거듭난 프로자이언트와 함께 동행을 하는 등산장비 브랜드의 탄생이었다. 까반은 1992년 3월 21일 특허청에 상표 출원하여 1993년 4월 20일에 등록되었다.

<까반 잡지 광고. 오두막을 형상화한 까반 BI>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을 했는데, 그가 평소에 등산을 즐겨해 업계에서는 기대감이 컸다. 1993년 여름시장부터 까반은 프로자이언트와 함께 의욕적으로 마케팅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문 등산화와 의류 브랜드 위주로 런칭한 까반은 새로운 제품들을 내놓았다. 산행 초보자용부터 전문 산악인용까지 고려한 여러 종의 등산화와 함께 다양한 의류가 출시되었다.
동진레저는 전문 동계용 텐트, 의류의 신소재 채택, 암벽화와 등산화의 개발, 릿지매트(Redge Mattress)의 국내 최초 개발이라는 획기적인 기술력으로 제품을 생산해냈다. 특히 배낭 등판의 획기적인 소재 선택 등은 기업 경영자가 아니라 산악인으로서 안락함을 추구한 일이었다. 발포성 스펀지를 배낭 등판에 적용해 등판이 축축하거나 불쾌한 땀과 습기를 공기순환 작용으로 배출시켜 쾌적한 산행을 돕는 기능이었다. 여기에는 에어매쉬(Airmesh)까지 추가로 적용시켰다. 기업가이기 전에 산악인인 강태선 사장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 그 미래보다 더 나은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직원들과 함께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나갔다.
이와 함께 동진레저백화점은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귀한 수입 장비 및 용품들을 다양하게 갖추어 전문 산악인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세계적인 나침반인 스위스의 렉타(Recta) 제품을 비롯해, 프랑스의 줄보(Julbo)나 갈리비에(Galibier), 시몽(Simond), 페츨(Petzl), 밀레(Millet), 독일의 레키(Leki)와 살레와(Salewa), 이탈리아의 캐신(Cassin), 스웨덴의 옵티머스(Optimus), 미국의 블랙다이아몬드(Black Diamond), 일본의 몽벨(Mont-Bell) 등 각 품목별로 정말 방대했다. 등산・레저 전문백화점답게 각 품목별로 최고의 제품, 품질 좋은 제품들이 매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초대형 납품

동진레저는 1993년 8월에 초대형 공개입찰에 응하게 되었다. 현대자동차가 소나타Ⅱ 출시기념으로 사원증정용 침낭을 의뢰했던 것이다. 약 20일 만에 3만 2,000개의 침낭을 제작 납품하는 일이었는데 단독으로 응찰하게 되었다. 국내 어느 업체라도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생산할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엄청난 물량에 모두들 탐을 냈지만 그만 포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태선 사장은 과감하게 도전장을 냈다. 당시 동진레저의 1년 생산 및 판매량은 약 1만 개 정도였다. 납품 기한 내에 제작을 마칠 수 있을 지는 그 또한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프로자이언트 침낭 광고>


불가능에 도전하게 된 강태선 사장은 현대자동차 사장 앞에서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현대자동차는 업체 선정을 하고 8월 14일에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은 사장 보고를 받고 노발대발 화를 냈다. 직원들이 노사분규를 일으키는데 회사에서 침낭까지 지원해줄 필요가 있느냐는 뜻이었다.
현대그룹의 계열사는 1993년 6~8월에 무더기 쟁의 사태를 겪었다. 물론 현대자동차도 조업 중단과 생산 차질을 빚었다. 정치・사회적으로도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현대 사태’는 심각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노사 잠정합의안이 노조 찬반 투표에서 가까스로 통과되어 진정되는 국면에 접어들고는 있었다.
이미 계약을 했지만 취소하라는 결정이 났다. 연락을 받은 강태선 사장은 아주 곤란하다고 답을 했다. 사실 준비가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지만, 모든 준비를 마친 업체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따졌다. 현대자동차는 다시 재검토를 하게 되었는데, 그만 이런 일들이 노조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원 선물로 준비하는 제품을 중단시킨다는 점이 노조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사내에서 설왕설래가 오가고 사원증정용 선물이 쟁의 진정 국면에 화근으로 작용할 조짐이 보였다.
현대자동차는 노사관계에 불씨로 작용하면 곤란할 것 같아서 결국 계약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소나타Ⅱ 출시 기념에는 다른 기념품으로 대체되었고 추석 선물용으로 바뀌었다. 납품기일은 9월 6일에서 약 2주 정도 뒤로 미루어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침낭을 지급하지 않고 현금을 주기로 했다. 직원들은 지급받은 현금으로 업체의 침낭을 직접 구입하는 것으로 노조집행부와 합의되었다. 물론 강태선 사장도 여기에 동의를 했다.
이후 강태선 사장은 서울, 성남, 부산 등 침낭을 만들 수 있는 제조업체를 모조리 물색하고 다녔다. 매일매일 침낭 제조 현황을 파악하면서 밤샘과 휴일작업을 강행시켰다. 기간 내에 만들 수 없다면서 지레 겁을 먹고 빠진 다른 업체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국내 업체를 총동원하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 1%의 가능성과 도전으로도 99%의 성공으로 갈 수 있다는 집념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서울의 공장에서는 완제품을 만들고 또는 제품을 구입해오기도 했다. 그리고 성남의 공장에서는 기본 봉제를 한 뒤에 부산의 공장으로 옮겨 마무리 하는 등 입체적인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회사와 노조집행부가 합의한 사원증정용 선물 사항을 노조원들이 문제를 삼고 다시 시위에 나섰다. 강태선 사장은 침낭을 만들고도 납품처가 없어질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보이스카우트 활동 때문에 강원도 설악산에 있었는데, 바로 택시를 대절해서 울산까지 달려갔다.
현대자동차에 도착한 강태선 사장은 시위대 현장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는 이번 시위로 인해 만들어 놓은 물건을 처리 못하면 한 중소기업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은 회사에 딸린 직원들과 수많은 협력업체의 직원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고 말했다. 침낭을 직접 지급받지 못해 약간의 불편함이 따라도 물건을 손에 쥐는 것은 어차피 똑같은 결과가 아니냐고 눈물로 호소했다. 산사람으로서 좋은 물건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산행을 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는데, 여기서 물거품이 될 수 없다고 설득했다.
노조집행부도 옆에서 거들어주기 시작했다. 산을 좋아하는 노조원들이 우선 안타까워 해주었다. 분위기가 점점 부드러워지더니 노조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빠져나갔다. 결국 시위대는 모두 물러났다. 이 일을 추후에 보고받은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이 강태선 사장을 만나자고 했다. 그는 시위를 물리쳐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현대자동차가 이번 공급 건을 마무리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당시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은 그룹 차원에서 노사관계 개선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전쟁과도 같은 일과를 보냈지만 동진레저는 납품기일을 지키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거대한 물량을 소화할 수 없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그래도 현대자동차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그룹 회장의 지시도 있었지만, 회사로 납품을 받지 않으니 기일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노조에서 단체로 현금을 입금해주면 5톤 트럭 한 대가 물건을 싣고 내려갔는데, 이런 과정이 11월까지 계속 반복 진행되었다. 결국 이번 프로젝트는 공개입찰이 아니라 개인 및 단체 판매 형식이 되었다. 거래도 어음이 아니라 현금이라는 좋은 결제 조건이었다. 창업 20년을 맞이한 해에 올린 큰 성과였다. 운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의 결과였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였습니다. 한밤에 11톤 차에 침낭을 실었죠.

외주로 생산을 하든지 다른 데서 구입을 해서라도 물건을 가득 실어서

보내야만 했었죠. 그때는 청계천 고가다리 밑을 종로매장의 전용 창고처럼

이용했는데, 도착된 침낭을 고가다리 밑에 잔뜩 쌓아놓고 기다리다가

준비해서 보냈습니다. 하루 일과가 12~1시 정도에 끝나면 종로에서

직원들과 함께 맥주 한잔 먹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 블랙야크 나영호 차장의 인터뷰-


사상 초유의 침낭 판매로 힘을 얻은 동진레저백화점은 1993년도 매출액 18억 9,583만 원을 거두어 전년대비 47%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4,842만 원으로 전년대비 62%, 당기순이익은 3,717만 원으로 전년대비 2.4배의 대단한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앞의 3년 치 순이익을 합쳐도 이에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었다.


 

히말라얀 그리고 야크와의 만남

1980년부터 강태선 사장은 수많은 해외 원정팀들에게 지원을 해왔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용품이든 현금이든 지원 방식은 다양했다. 마나슬루 원정을 비롯해서 수많은 해외 원정 지원을 통해 산악계 발전에 작은 밀알이 되어주었다. 1992년 7월 14일에는 동진레저백화점이 후원한 서울시산악연맹의 원정팀이 낭가파르바트 7,700m에서 안타깝게 후퇴하기도 했다. 준비위원장으로 그들을 떠나보냈던 강태선 사장은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실패를 해도 직접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해외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문 산악인들에게 있어 원정 준비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항상 경비 마련이었다. 이 부분은 별도의 지원이 없으면 개인적으로 해결하기가 곤란하다. 강태선사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도 산악연맹이나 산악회, 산악인들에게 정성껏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원정팀들은 국내 업체에서 등반 지원으로 받아간 장비 등을 현지 시장에서 내다팔기도 하고 셰르파에게 임금 대신 주기도 했다. 부족한 등반 비용을 보충하기 위한 일종의 관행이었다. 한국의 원정대가 대부분 열의만 컸지 재정이 빈약해 무모한 등정을 시도하다 사고를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1993년 8월 14일 강태선 사장은 해외 원정팀 단장의 자격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히말라야의 초오유와 시샤팡마 연속 등정의 목표로 원정에 나선 무리는 바로 거봉산악회였다. 거봉산악회 회장인 강태선 단장을 비롯해 홍영길 대장과 장재순 부대장, 엄홍길 등반대장, 이상근, 소흥섭, 박병태, 박종숙, 민경태, 최병수 등 10명의 단일 산악회 회원들이 출사표를 던졌다.
히말라야를 가보자고 의기투합으로 결성했던 거봉산악회의 큰 꿈은 장장 1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번 원정을 위해 강태선 사장은 약 9,000만 원 정도의 경비를 지원했다. 그는 히말라야로 가는 부푼 꿈을 44세의 나이에 이루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창업 20주년을 맞이해 의미까지 남달랐다.

<1993년 거봉 초오유·시샤팡마 원정대>


초오유는 ‘여신’ 또는 ‘터키 보석의 여신’, ‘청록 여신이 거처하는 산’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수많은 한국 원정대가 실패를 맛보았던 봉우리였다. 1992년 9월 20일 울산・서울합동대가 국내 초등정을 해냈다. 거봉산악회가 초오유를 등반할 때, 첫 날 밤을 자고 일어나니 강태선 사장은 고산병의 증세를 보였다. 화장실을 가기도 힘든 몸 상태였다. 홍영길 대장이 부축해서 화장실을 다녀올 정도였다. 그런데 다음 날에는 아주 말짱한 모습으로 대원들 앞에 섰다. 대원들은 모두 놀랐다. 역시 강태선 사장은 산사람다웠다.
한편, 히말라야에 간 강태선 사장은 20여 년 전에 말로만 들었던 야크를 직접 보게 되었다. 강인한 인상과 신비롭기까지 한 야크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때 이 모습을 본 엄홍길 등반대장이 말을 건넸다. “야크, 이름 너무 멋진 것 같지 않아요? 저걸 상표로 만들면 어떨까요?”
강태선 단장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는 홍영길 대장을 불렀다. 다양한 야크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많이 담아 한국에 돌아가면 꼭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히말라야 원정에서 본 야크>


마침내 거봉산악회는 1993년 9월 10일 엄홍길, 민경태, 최병수 대원이 초오유 정상에 올랐다. 다음은 시샤팡마 차례였다. 안타깝게도 강태선 단장은 사업상 문제가 생겨 중간에 국내로 돌아와야만 했다. 시샤팡마 등정 성공을 직접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게 된 강태선 사장은 홍영길 대장에게 대원들을 당부하고, 다시 한 번 야크 사진을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시샤팡마는 ‘성스러운 장소’ 혹은 ‘신의 거주지’라는 의미를 가졌다. ‘일기 변화가 극심한 산’이라는 뜻도 있었다. 1979년까지 중국이 외국 등반대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 10년 이상 발길이 끊겼던 산이었다. 1991년 10월 대한산악연맹에 의해 국내 초등정이 이뤄졌다. 1993년 9월 28일 거봉산악회의 엄홍길, 민경태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정상 공격 도중에 포기하고 먼저 하산시킨 박병태 대원이 실종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거봉산악회는 연속 등정의 두 번째 대기록(단일 산악회로는 최초)을 세웠으나, 대원을 잃은 슬픔을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초오유·시샤팡마에 펄럭이는 프로자이언트, 까반 깃발>


한편, 강태선 단장은 처음 히말라야를 오르면서 등반이 명예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등반 행위가 자신을 향한 길이자 도전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정상에 오르는 사람이 산 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산을 스승으로 삼았던 그는 ‘그래, 사람이 산이다.’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최고의 등반 기술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였다. 생존을 위한 제품이 최고의 등산 제품이며, 반드시 책임질 수 있는 품질이 보장되어야 함을 인식했다. 믿을 수 있는 품질로 물건을 만들고, 합당한 가격에 공급하는 본연의 업을 다시 되새겼다. 모든 산악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 믿을 수 있는 회사로 가꾸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동진레저의 돛을 펼치다

동진레저는 공장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기가 갈수록 여건이 어려워졌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로 인해 중국으로 현지 공장을 옮기는 사례가 모든 산업 부문으로 갈수록 확산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공장 용지를 구하기도 어렵고 토지 가격도 너무 비쌌다. 임금 또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치솟고 있는 상태였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중국에 교두보를 마련하자면서 붐이 일었던 것이다. 중국의 내수시장 잠재력, 저렴한 인건비와 토지 이용 가격, 풍부한 자원 등이 국내보다 크게 유리했다.

<동진레저 중국공장>


이런 배경 속에서 강태선 사장은 1993년 중국 다롄(大連)에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면 경쟁력이 제고될 것으로 판단하면서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20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했는데, 공장 운영이 생각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낙후된 인프라가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았고, 주요 원부자재의 수급도 어려웠으며, 제도와 절차의 복잡성과 ‘시(관계)’의 부족 등이 걸림돌이었다. 중국이 매력적인 게 사실이었지만, 갖가지 위험 요소가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한편, 동진레저의 생산 제품에 고어텍스 원단이 처음으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1993년 11월 미국의 고어(W. L. Gore & Associates, Inc.)와 판매 라이센스 계약을 맺었다. 까반 고어텍스 오버트로우저를 생산해 판매에 들어갔다. 그런데 계약 당시에 직원들은 이를 적극 만류했다. 다른 좋은 원단도 많은데 굳이 그렇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는 의견들이었다. 심사숙고한 끝에 강태선 사장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고, 이미 한발 늦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직원들에게 설명했다.
1972년 섬유로 처음 탄생된 고어텍스는 ‘기적의 소재’, ‘제2의 피부’라고도 불리며 아웃도어 의류 역사에 있어 큰 획을 그었다. 최고의 방수, 투습, 방한, 방풍 소재로 전문 산악인들에게는 정평이 나있다. 1990년 국제남극대륙횡단팀이 고어텍스 옷을 입고 극한에서의 성능을 입증했다.
고어텍스 제품은 1986년 12월에 출시된 거위 털 파카가 국내 처음이었다. 1991년 8월 고어코리아가 국내에 설립되고 난 뒤, 등산 및 스키 등의 제품에 고어텍스를 적용하는 업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고어텍스를 입기 위해 전문 산악인들은 외제 등산복을 입었는데, 이제는 국산 등산복으로 입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
고어텍스는 미국의 NASA에서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의 우주복 소재로 채택했으며, 인공혈관과 인공피부, 인공심장 등에 쓰이는 소재로 명성이 드높았다. 코팅 처리한 다른 소재와는 달리, 고어텍스 필름을 섬유에 직접 합포시키는 라미네이팅 기술로 내구성까지 탁월했다. 재봉선의 미세한 틈까지 고려해 고어텍스 테이프로 완벽하게 접착시키는 심 실링(Seam Sealing) 가공으로 제품의 완벽성이높았다. 고어텍스에 대항하기 위해 하이포라, 바이엑스, 멕코이 등의 국산 원단이 개발되었지만 모두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1994년 6월 10일, ㈜동진레저백화점은 ㈜동진레저로 상호를 변경했다. 공장으로 기존에 등록되었던 ㈜동진레저는 폐쇄 및 합병시켰다. 스키 취급 물량을 줄이면서 등산・레저백화점의 꿈은 일단 접게 되었다. 강태선 사장은 전국 전문백화점 체인 사업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다양한 레저 부문에 전부 손을 뻗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레저 부문마다 전문가가 되지 않고서는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오로지 한 길로 달려온 등산에 보다 주력하기로 했다.
뒤이어 7월에는 미국의 고어로부터 고어텍스 생산 및 판매 라이센스를 모두 획득하게 되었다. 고어텍스에 대한 보다 엄격한 관리를 받게 되었지만, 생산과 판매를 모두 병행하면 훨씬 이점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한편, 동진레저의 보이스카우트 수품에 대한 외국의 평가가 너무 좋아 수출로 이어지게 되었다. 프랑스, 스위스, 일본,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으로 텐트와 배낭 등을 수출해 약 150만 달러의 실적을 거두었다. 이제 동진레저는 수출기업으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아시아지역 보이스카우트 수품공급업체 회의에 참석한 강태선 사장>


바쁜 사업에도 불구하고 강태선 사장의 외부 활동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1994년부터 그는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는 서울시산악연맹 이사로, 1995년부터는 서울시산악연맹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외에도 1992년에는 전국자연보호중앙회 명예총재로 선임되었다. 전국자연보호중앙회는 1986년 3월 1일에 설립된 단체였는데, 자연보호를 위한 뜻깊은 일이라 사무실 운영이나 행사 등을 지원해주었다. 1993년 10월부터는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부터 자문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자문위원회는 각계인사 18명으로 구성되었다. 강태선 사장은 국립공원 및 생태계의 원활한 유지와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자문 활동을 했다. 갈수록 많아지는 외부 활동에도 그는 강철 같은 체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회사의 자금은 물론 상품까지도 여러 후원이나 지원 형태로 많이 쓰였다. 넉넉하지 않은 시간, 넉넉하지 않은 여유, 넉넉하지 않은 형편임에도 이 모든 것들을 소화해냈다. 이는 그가 인복이 많아 훌륭한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 열정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공원 자연사랑 캠페인>


1994년도 동진레저의 매출은 23억 2,073만 원으로 전년대비 22.4%의 신장을 나타냈다. 영업이익은 3,513만 원으로 지난해보다 감소했다. 그래도 당기순이익은 3,799만 원으로 전년대비 2% 증가를 했다. 매출 신장세에 비해 수익이 낮아졌는데, 이는 투자와 부채 규모를 줄이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다음해인 1995년도에는 매출이 28억 6,400만 원으로 23.4%의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영업이익은 4,467만 원으로 다시 회복되었으며, 당기순이익은 4,607만 원으로 21.2%의 증가세를 나타냈다.
한편, 동진레저 사내에 동진산악회가 1995년 6월 7일 창설되었다. 동진산악회는 서울시산악연맹에도 가입을 했다. 이철남이 만장일치로 초대회장에 선임되었다. 사내 동호인 모임으로서 지원을 받았으며, 직원들은 산악 활동을 통해 화목과 팀워크를 다졌다. 산행 경험도 더욱 쌓고 제품에 대한 이해도까지 높이는 일이었으며, 제품 테스트를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1995년 동진레저 춘계야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