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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6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강남 압구정시대의 개막

웅비의 터전 첫 마련

1990년 1월부터 동진등산장비총판은 동진레저백화점으로 거듭났다. 17년 동안 자리를 지켰던 종로시대에서 강남 압구정시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종로5가는 판매점으로 계속 존속시키면서 일부 직원들을 남겨두었다. 산악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아왔고 강태선 사장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1989년 12월 16일 오후 3시, 마침내 본사 이전 및 개관식을 개최했다. 이날은 거봉산악회 회원들까지 나서서 개관식을 거들어주었다. 한복을 차려입고 손님맞이를 한 회원부터 궂은일을 맡아준 회원까지 있었다. 흥겨운 잔칫집 분위기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압구정 사옥 준공 및 개관 기념식>

<동진레저백화점 준공 및 개관기념식 후 직원 단체촬영>

사옥은 행정구역상으로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50-17번지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압구정으로 불렀다. 실제로도 압구정역 및 압구정로와 매우 가까웠다. 광림교회 옆에 위치한 신축 빌딩은 새로운 웅지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강태선 사장은 신축을 위해 자택을 헐면서 미성아파트로 살림을 옮겼고, 몇몇 직원은 계속 숙식을 같이 했다. 준공 이후에는 압구정현대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한편, 신축 공사를 진행하면서 강태선 사장은 많은 애로를 겪었다.
기존 건물을 헐어내고 땅을 파자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왔다. 포크레인을 동원해 땅을 파내는데 감당할 수 없는 물 때문에 중장비 기사가 중간에 포기했다. 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뿜어져 나왔다. 뒤늦게 작은 저수지를 메운 자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 위에서 약 8~9년을 살았던 셈이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수맥이 흐르는 자리에서 강태선 사장은 오랫동안 아무 탈 없이 지내왔던 셈이다.
결국 건설업자는 남는 게 없는 공사라고 도망을 가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여기에 수영장을 만드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혹시 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강태선 사장은 이틀 동안 자리를 꼬박 지켰다. 바로 옆이 신구초등학교라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어렵게 새로운 건설회사를 물색해 새로 투입시켰다.
그는 지하층에 방수가 많이 염려되어 벽을 이중으로 치도록 하였다. 물을 퍼내면서 막고 콘크리트를 치고, 이리 돌린 물을 다시 막고 콘크리트를 치는 형태였다. 만약 벽을 넘어 물이 들어오면 다음 벽이 막아주는 이중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흔치 않은 공사방법이라 애를 먹었다. 덕분에 건물은 정말 단단하게 지어졌다. 만일에 대비해 건물 네 귀퉁이에는 모터펌프까지 설치했다.


법인으로의 새 출발

1990년 3월 13일, 마침내 동진레저백화점은 법인으로 등록을 했다. ‘주식회사 동진레저백화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1주당 5,000원으로 2만 주가 발행되어 설립자본금은 총 1억 원이었다. 법인의 사업 목적은 레저 스포츠용품 제조 판매업, 스포츠 레저용품 수출입업으로 정했다. 이제 법인 사업체로 껍질을 깨고 나온 ㈜동진레저백화점은 보다 큰 사업의 꿈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압구정 사옥 1층 등산 및 레저용품 매장>

<압구정 사옥 3층 스키용품 매장>


우선 동진레저백화점은 원스텝 쇼핑센터를 표방했다. 이제까지의 등산장비총판을 넘어서 등산・레저 전문백화점을 지향했다. 사옥의 연건평은 총 270평이었다. 지하와 1층에 등산 및 레저용품을 배치하고, 2층에는 스키 및 레저용품을 들여놓았다. 3층은 스키 전문용품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4층은 사무실과 ‘동진스포츠레저정보센터’를 두었다. 동진스포츠레저정보센터는 무료로 외부에 개방되었는데, 국내・외 산악 및 등산관련 정보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하였다. PC통신 등을 통해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산악인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주고 싶었던 마음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압구정 사옥>


강태선 사장은 국내 최초이자 최대인 등산・레저용품 전문점을 개장한 자부심으로 ‘뉴 프로(New Pro)시대’를 선언했다. ‘자이언트’에서 ‘프로자이언트’로 본격적인 교체를 단행했으며, 상표와 심벌도 새롭게 선보였다. 잡지광고 등의 마케팅 활동도 상당히 활발해졌다. “이제 동진은 많이 만들지 않습니다.”라는 광고카피를 사용했는데, 전문가의 안목으로 제품의 기능과 디자인, 컬러를 새롭게 적용시켰다.
산사람인 강태선 사장은 물론 거봉산악회의 전문 산악인들이 등산화, 배낭 등을 직접 필드테스트 해주는 강점을 더욱 살려 개발실을 운영했다. 또한 회원제를 도입해 고객 장비의 보관과 관리 등에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한편, 동진레저백화점의 상호 로고는 서예가이자 산악인인 선배가 캘리그래피(Calligraphy)로 써주었다. 해병대 병사 군번 1호였던 그분의 필체는 처음 접했을 때 힘이 넘쳐 마음을 뺏겼었다. 강태선 사장이 지리산 산행 중에 배낭을 대신 들고 다니면서 그에게 어렵게 부탁했는데, 그만 “내가 간판장이냐?”라는 핀잔을 들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글씨를 쓰는 분한테 무리한 부탁을 했던 것을 뉘우쳤다. 없던 일로 하면서 연신 사과했는데, 이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어느 날 그가 나타나서 글씨를 내놓았다. “어때, 마음에 드는가?”
강태선 사장은 압구정시대를 생각하면서 일본의 전문백화점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평소에 그는 일본 시장과 제품 등을 살펴보기 위한 발걸음을 자주 했던 편이었다. 일본에서 도시마다 전문백화점을 체인으로 운영하는 한 사업체를 보았는데, 그 형태가 인상적이면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때 이후로 강태선 사장은 등산, 스키, 스킨스쿠버 등 대형 레저전문점을 전국에 체인화하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시작이 바로 압구정이었다. 이런 속내로 스키를 취급하게 되었다. 스키 부문의 사업이 안정되면 다른 영역으로 더욱 확장할 계획이었다.
동진레저백화점으로 거듭나면서 제일 먼저 달라진 점은 디자인실과 개발실을 두었다는 점이다. 물론 디자이너도 새롭게 채용을 했다. 눈대중이나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전문적인 식견과 디자인 능력 없이는 제품을 팔 수 없는 시대로 변할 것이라고 느꼈다. 우선은 선진 제품, 좋은 제품의 디자인과 기능, 소재 등을 공부하면서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디자인 파워가 제품 개발에 반영되는 일은 어느 한 순간에 터지는 것이 아니라 바탕을 꾸준히 다져야만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강태선 사장은 프로자이언트 말고도 다른 브랜드를 육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1985년과 1986년부터 ‘제로 포인트(ZERO Point)’와 ‘하드프리(HARD FREE)’ 등을 제2, 제3의 브랜드로 키워보려 애써왔는데 뜻대로 잘되질 않았다.

<압구정 사옥 내 상품기획실>


‘제로 포인트’는 말 그대로 영점을 뜻하는 말이었다. 수직선 위에서 영점이란 어떠한 숫자도 개입되지 않는 사이 공간이며, 양수와 음수 사이의 경계이면서 기준이다. 즉, 제로 포인트는 한계를 넘어 본성과 만나는 중요한 틈새이며, 늘 우리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뜻을 지녔다.
‘하드프리’는 사람마다 적용이 다를 수 있는 유행하는 등반 개념이었다. 인공적인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의 육체적 능력만으로 등반하는 프리 클라이밍 중에서 난이도가 높은 것을 하드프리 클라이밍이라고 한다. 이를 줄여서 하드프리라고 불렀는데, 사람마다 한계치가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의 하드프리는 제각각이다. 1980년대 하드프리 부흥의 기운이 산악계에 널리 퍼졌다.
하지만 새로운 두 브랜드가 정착되지 않아 오로지 프로자이언트 하나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무엇인가 허전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품격 높은 브랜드를 소유해야 하는데 기존의 브랜드들은 이미지 빌딩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고급 브랜드에 대한 갈망이 목마름처럼 남아있었다.

동진레저로 공장 등록

강태선 사장은 직접 공장을 운영하면서 많은 제품을 생산했지만, 여러 협력업체와도 많은 거래를 해왔다. 물량 전부를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인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보이스카우트의 수품(需品)은 모두 신학기에 쏟아져 나와야만 했다. 좋은 협력업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큰 무기가 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경쟁하던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자체 생산을 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좋은 하청업체를 가지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동진산악 시절부터 아주 오랫동안 거래한 PJ라는 전문배낭업체가 있었는데 OEM 방식으로 꾸준히 납품을 받아왔다. 항상 성실한 자세로 사업을 하면서 품질도 별로 문제되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것은 새로운 제품 개발 능력이 부족한 점이었다. 시제품이나 주문 사항 등을 먼저 제시해야만 반영되었다.

<프로자이언트 배낭 광고>


그러던 중 1983년의 어느 날, 동진등산장비총판에 들어와 ‘써미트’라는 배낭을 찾는 사람들이 간혹 생겨났다. 강태선 사장은 보유하지 않은 제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써미트의 사장을 불렀다. 써미트의 장재순 사장은 바로 거봉산악회의 멤버였다. 두 사람은 거봉산악회 회장과 부회장의 관계였다. 강태선 사장은 일단 만나서 모든 제품 샘플을 다 가져와보라고 말했다. 써미트의 배낭은 기존의 제품과 다른 디자인 및 기능 등을 적용한 제품이었다.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었으며, 남이 아닌 악우(岳友)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배낭의 협력업체는 PJ에서 써미트로 전격 교체되었다. 무려 약 10년 가까운 거래가 일단락되었다. 강태선 사장은 악우의 제품을 많이 팔아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2개월 뒤부터는 자이언트 상표를 달고 OEM 방식으로 납품을 결정했다. 마치 써미트는 동진의 자체 공장처럼 고맙게 움직여주었다. 사실 써미트의 장재순 사장은 자신의 상표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체 물량 중에 10% 정도만 써미트 상표를 달아서 남대문시장 쪽에만 주로 유통시켰다. 강태선 사장은 그런 부분을 모른 척 해주었다. 써미트에 대한 대금결제는 무조건 0순위였다. 협력업체 중에서 써미트를 비롯한 믿음직한 3군데는 와서 손만 벌리면 즉시 해결해주었다.
써미트 장재순 사장은 “저를 비롯한 세 사람에게는 항상 결제를 칼같이 해주었습니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어음이 아니라 현금으로 주었죠. 급하게 인력 동원이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죠. 호황기 때나 성수기 때에는 써미트에서 퇴근하고 곧장 동진으로 달려가서 일손을 거드는 일도 다반사였어요. 써미트의 사장이 아니라 동진의 공장장처럼 열심히 도왔죠. 강태선 사장이 저보다 몇 수는 높은 분이라 옆에서 많은 걸 배웠죠. 특히 그의 집념과 추진력은 정말 대단합니다.”라고 말했다.
강태선 사장이 새벽 도매시장을 다니면서 좋은 제품을 찾는 방법에 대해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장재순 사장의 귀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새벽시장에 나가면 그 집의 제품을 보지 않고, 사장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다. 사장을 보면 그 집의 제품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누구나 잠을 못자고 새벽에 나온 것인데, 어떤 주인은 깔끔하게 면도하고 복장도 단정하면서 넥타이까지 갖춰 입고 있다. 분명 그 집의 제품은 확실하다. 반면에 주인이 머리도 감지 않아 비듬도 있고 꾀죄죄한 차림새로 있는 곳이 있다. 그런 집의 제품은 보나 마나 실밥투성이거나 단추도 단단히 달리지 않아 있다.”라고 했다.
창업 이후, 미싱 3대로 점포 안에다가 공장을 처음 차렸던 강태선 사장은 1977년부터 종로5가에 별도의 공장을 운영했다. 1980년부터 자리를 옮겨 운영되기 시작한 사근동 공장은 1986년에 폐쇄했다. 이후 협력업체에 대한 의존도는 상당했다. 그런데 마치 형제처럼 같이 달려왔던 OEM 공급기지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1989년의 어느 날, 써미트의 장재순 사장이 찾아와 자체 상표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혀 강태선 사장은 고민이 되었다. 약 7년 동안 거래해온 그가 써미트 브랜드로 홀로서기 하겠다는 것을 만류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갈 길을 가겠다는 사람을 무작정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1년만 더 하기로 상호 합의했다. 써미트 장재순 사장은 자신이 BI 디자인 초안을 해준 프로자이언트 제품을 1990년까지 생산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1990년 4월 1일 강태선 사장은 동진레저백화점 지하에 자가 공장을 두게 되었으며, 공장은 ㈜동진레저로 등록했다. 등산용 의류와 용품을 제조하는 공장의 종업원 수는 약 25명 정도였다. 어느새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강태선 사장은 더욱 심기일전해 동진레저백화점을 이끌게 되었다. 자이언트에서 프로자이언트로 업그레이드 된 동진의 등산용품은 자체 생산을 통해 다시 새로운 도약을 노리게 되었다.

코마운트(KOMOUNT) 참가

 


동진레저백화점은 신사동 광림교회 뒤편에 약 200평 정도의 창고를 별도로 마련했다. 매장과 공장 때문에 물류를 위한 창고가 절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설 속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한 프로자이언트 텐트를 생산 및 시판했다. 전문가를 위한 이런 제품들은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과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치열한 고집과 장인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끝없이 신기술과 새로운 디자인 개발에 나선 강태선 사장은 직원들에게 프로정신을 특별히 강조했다. 동진의 맨파워 강화를 위해 새로운 인재도 계속 물색하면서 영입했다.
국가공인시험기관인 한국생활용품시험검사소(현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로부터 1987년에 Q마크(품질인증마크)를 획득했던 동진레저백화점의 주력상품은 텐트와 배낭이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프로자이언트 제품은 첨단 신소재 채택, 최신 공법, 다양한 디자인, 인체공학 응용, 최적의 안락함을 위한 설계 등에 집중했다. ‘최후의 선택이 최고의 품질과 만난다.’라는 동진의 광고 문구는 강태선 사장의 경영철학을 잘 대변해주었다.

<동진레저백화점의 주력상품인 텐트와 배낭>


1990년 3월 16~19일에는 제1회 국제산악장비전(KOMOUNT ’90)이 열렸다. 동진레저백화점은 한국종합전시장(KOEX)에 부스를 마련했다. 국내업체는 28개, 외국의 업체는 4개가 참가했다. 코오롱과 한라스포츠 등 큰 기업체들이 다수 빠진 게 흠이었다. 그리고 영세한 업체들은 참가비와 참가에 따른 여러 부담들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동진레저백화점의 부스에는 커다란 프로자이언트 로고가 천장에 매달렸으며 다양한 제품들을 전시 및 판매했다. 강태선 사장이 꿈꾸는 사업 지향점인 ‘레저토피아(Leisure Topia)’라는 문구도 함께 내걸렸다. 레저토피아는 레저(Leisure)와 유토피아(Utopia)가 합쳐진 말이었다. 동진레저백화점이 열어갈 레저토피아 세상, 토털 스포츠 세상을 알리기 위해 강태선 사장은 행사에 참여를 했다. 전시 기간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린 부스 중에 하나였으며,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멘 채로 전시회를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 프로는 첫 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강태선 사장은 정말 프로다운 제품을 제대로 만들라는 격려로 생각했다.
국제행사로 처음 치러진 코마운트는 낚시용품 전시회인 코피쉬, 골프용품 전시회인 코골프와 함께 전시회를 진행해 관람객 분산의 역효과를 보았다. 국제전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는 측면도 일부 있었다. 첫 행사라 그런지 외국의 바이어 방문도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주최 측은 행사 참가자가 할인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도록 조치했다. 행사장 안에는 인공암벽을 설치해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도 했으나, 바로 앞에 부스를 차린 업체는 암벽에 가려져서 불만이 많았다. 인공암벽에서는 경기가 진행되어 홍보효과가 상당히 컸다. 당시 국내의 등산장비 및 용품업계는 원화의 평가절상 추세 때문에 수출 여건도 상당히 어려운 형국이었다. 행사를 주최한 대한산악연맹은 국제행사를 통해서 수출과 내수를 확대하는 데 앞장서려고 노력을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정부의 환경보호 조치로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90년 10월 정부가 취사야영금지와 휴식년제를 내놓았다. 11월 15일부터 11개 국립공원에 우선 적용되었고, 1991년 3월부터 전면 시행되는 법안이었다. 산불경방을 위한 입산 금지 구역까지 감안하면 상당히 충격적인 조치였다. 반면에 불도저로 산을 깎아내는 무분별한 개발은 아무런 제약이 따르지 않았다. 관련업계는 심한 소용돌이에 빠졌다.
1991년 벽두부터 소비자들은 텐트와 침낭, 버너와 코펠 등을 거의 구매하지 않게 되었다. 배낭에도 그 여파가 미쳤다. 대용량 배낭 대신 작은 배낭만이 팔리게 되었다. 1박 2일 산행이 당일 산행으로 바뀌었다. 시중에 매기는 갈수록 얼어붙었다. 당장 봄부터 산을 찾는 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따라서 등산 장비와 용품을 구매하려는 고객도 대폭 줄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북한산의 경우에 입산객이 27% 정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업체들이 큰 위협에 직면했다.

“업계에 따르면 예년에는 3월로 접어들면 야외취사도구인버너, 코펠, 연료, 텐트 등

기본 장비를 찾는 고객들로 매장이 붐볐으나 올해는 피크닉 찬합, 물통, 일회용

식탁용품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특히 등산용품의 경우 당일행이

늘면서 대형 위주에서 소형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이며, 이에 패션을 강조하는

원색의 조끼, 바지, 남방 등의 나들이 의류가 인기를 끌고 있다.”
- 경향신문 1991년 4월 17일자 기사 중에서-


이런 공통의 시련 속에서 국제등산장비전이 다시 개최되었다. 1991년 3월 21~25일에 제2회 국제등산쇼(KOMOUNT ’91)가 열렸다. 지난해와는 행사명이 일부 달라졌으며 참가기업도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이에 앞서, 등산장비 제조업체와 판매업체들은 1991년 1월 7일에 한국등산장비업체총연합회를 결성했다. 취사야영금지에 대한 자구책을 서로 논의하고 단체 행동을 할 구심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전국의 거의 모든 업체가 코마운트 행사를 계기로 모여들었다. 열띤 논의를 거듭했지만 뾰족한 대안이 나오질 않았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중동에 걸프전쟁이 일어나 물가와 유가까지 난리가 났다. 다른 업종의 경기도 불황의 침체에 빠져있는 심각한 상태였다.
이후 많은 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도산하는 등 업계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산과 바다는 먹고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는 인식은 그나마 확산되었다. 쓰레기가 줄고 계곡물이 점점 맑아졌다. 해마다 겪던 산불 피해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이름난 산마다 유료공원화되며 흙길을 시멘트로 뒤덮고 온갖 위락단지가 세워지며 산중턱까지 콘도나 호텔들이 들어섰다. 심지어 산꼭대기에 아스팔트 도로가 세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산행이 아닌 자가용을 위한 당국의 깊은 배려였다. 자연을 보호한다면서 그린벨트를 해제시켜 골프장이 여기저기 들어서는 실정이었다.

판매량이 급감하면서 업계는 차량을 이용한 오토캠핑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무게가 가볍고 세트화된 고가품 개발에도 주력했다. 자동차 보급대수가 이미 350만 대를 넘어섰고 연평균 25%의 증가 추세를 보였다. 자동차를 이용한 오토캠핑의 대중화 추세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휴가철을 맞이해 등산・레저용품업계는 끼워팔기 경쟁을 벌였다. 텐트 하나만 사면 배낭, 버너, 식기세트 등 10~50가지의 등산용품을 끼워주었다. 더 심한 곳은 고무보트나 낚시장비까지 덤으로 끼워 넣었다. 업체들은 저마다 생산량을 20~50% 정도 감소시켰지만 실제 수요가 더 밑돌아 50%가 넘는 할인판매와 할부판매까지 나섰다. 코오롱 등 대기업은 20~30% 할인 판매에 들어갔고, 중소기업들은 40~60%까지 할인율을 높여 제살깎기에 들어갔다. 재고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갈수록 출혈경쟁이 심해졌다.
살아남기 위한 이런 경쟁들은 수익 악화로도 이어져 경영 여건을 크게 훼손시켰다. 소비자들도 겉으로는 이익으로 보였지만 속을 살펴보면 손해일 수도 있었다. 덤핑 제품이나 도산한 업체의 제품이 끼워팔기에 동원된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시장 여건이 좋지 않자 시중에는 Q마크나 GD마크(우수디자인마크) 등을 받지도 않은 조악한 제품들도 많았다. 국가공인시험기관의 품질인증마크인 Q마크나, 디자인과 기능, 안정성, 품질 등을 심사해 정부가 부여하는 GD마크 등이 없는 제품은 안전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점입가경의 업계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와 ‘과연 살아남아도 미래가 밝은가’의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야간 등반 안전사고 예방과 모닥불 등을 피우는 사례들 때문에 1991년 11월 15일부터 15개 국립공원에 대해 야간등반을 금지 및 허가제로 바꾸고 지정된 등산로의 경우에만 허가를 해주었다. 업계에 닥치는 악조건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
1992년 3월 13~16일 개최된 제3회 국제캠핑 및 등산장비쇼(KOMOUNT ’92)는 한국종합전시장(KOEX)과 스포츠조선의 공동주최로 열렸다. 낚시, 캠핑 및 등산, 골프장비 전문전시회가 동시에 개최되었는데 이는 레저 붐을 이어가기 위한 주최 측의 방안이었다. 코마운트에는 캠핑, 등산 및 오토캠핑, 스키용품 등이 전시되었고 레저・스포츠웨어 패션쇼까지 열렸으나, 이로 인해 이 행사는 마지막 개최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한 대기업이 의욕적으로 열었던 대형 패션쇼에 관객들이 모두 몰려버렸다. 당연히 다른 참가업체들은 들러리가 된 기분이 들었고, 이럴 바에는 다음부터 참가하지 않겠다는 성토들이 터져나왔다.
한편, 강태선 사장은 1992년 1월 23일부터 한국등산장비업체총연합회 제2대 회장을 맡았다. 아리랑산악의 황보현 사장이 초대 회장이었다. 그는 100개 회원업체 및 연합회의 활성화와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종합레저지 <야외생활>을 창간했다. 회원업체들이 번갈아가면서 광고를 내도록 유도했으며 등산동호인은 물론 일반인들로부터도 큰 호응을 받았다.

<종합레저지 "야외생활">

세계잼버리대회 야영장비업체로


1991년 8월 8~16일, 청소년들의 대축제이자 ‘새싹올림픽’으로도 불리는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가 8박 9일 동안 강원도 고성군 신평벌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은 1985년 뮌헨 총회에서 네덜란드와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과 경합해 유치권을 따냈다. 올림픽 개최 이후, 달라진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더욱 높여줄 행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구권 국가들이 처음으로 세계잼버리대회에 참가해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국제적 이해와 동서 화합을 도모하는 의미까지 있었다.
‘세계는 하나(Many Lands, One World)’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세계잼버리대회는 약 250만 평의 부지 위에서 개영식을 열었으며, 총 133개 국가의 약 1만 9,081명이 참가를 했다. 각국의 보도진도 약 500여 명이나 참석했다.
잼버리(Jamboree)는 우리말로 ‘유쾌한 잔치’, ‘즐거운 놀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올림픽에 버금가는 국제적인 큰 행사였다. 잼버리는 야영대회로서 지구촌의 내일을 이끌어갈 세계의 청소년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정과 화합을 다지는 한마당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대자연 속에서 야영생활을 통해 이념과 인종을 초월하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견문을 넓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려는 목적까지 가졌다.
세계잼버리대회는 1983년 한국보이스카우트 지원재단 설립 이래로 보이스카우트 야영장비 대행업체로 부단히 활약해온 동진레저백화점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전 세계 야영장비들과 실력을 겨루고 공부도 겸할 수 있는 찬스였다. 그동안 동진레저백화점은 보이스카우트 야영장비의 생산과 공급을 위해 힘써온 바가 컸고, 신뢰 또한 공고했기 때문에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 야영장비업체로 선정되는 쾌거를 올렸다. 선정되지 못한 다른 업체들은 야영장비를 무료로 공급해 홍보효과를 노리기도 했다.
세계잼버리대회에 참가한 133개 나라들 덕분에 대회장은 마치 세계 야영장비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수많은 등산전문 브랜드의 제품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전 세계 참가자들은 한국의 제품들을 직접 만나볼 수도 있었다. 많은 VIP들도 잼버리야영장을 찾아왔다. 8월 12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스카우트 모자를 쓰고 항건까지 매고 찾아와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각국의 청소년들을 만났다. 그는 “신라 왕조에는 보이스카우트와 비슷한 화랑이 있었으며 많은 걸출한 지도자가 배출되어 한반도에 통일국가를 세우는 일을 주도했다.”라며 “모든 나라 내일의 주역들은 이제 손에 손잡고 더 나은 하나의 세계를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월 13일에는 스웨덴의 국왕인 칼 구스타프 16세(Carl ⅩⅥ Gustaf)가 특별히 내한했다. 그는 세계스카우트 지원재단 이사장의 자격으로서 잼버리 행사를 직접 참관하기 위해 방문했다. 1973년 9월 왕위에 오른 그는 환경보호와 스카우트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아왔다.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 참석한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 야영장비업체로 선정>

<호주 시드니 세계잼버리대회에 준비실무위원으로 파견된 강태선 사장>


8월 14일 신평벌에 나타난 구스타프 국왕은 최고의 VIP임에도 불구하고 호텔 숙박을 거절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대회장 내에 마련된 스페인 영지의 텐트에서 직접 숙영을 하겠다고 밝혔다. 대회 운영 관계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날 구스타프 국왕은 한국산 텐트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는지 밝은 표정으로 아침에 나와 마지막 행사인 폐영식까지 참석을 했다.
한편, 구스타프 국왕이 하룻밤 묵었던 텐트는 세계 1위 모자 생산업체인 영안모자의 백성학 회장이 7,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주고 샀다. 스카우트 영광의 역사를 빛내주면서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을 간접적으로 재정 지원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는 김석원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쌍용그룹 회장)의 초청으로 온 참관객일 뿐이었다. 이런 인연이 계기가 되어 백성학 회장도 김석원 회장과 강태선 사장처럼 스카우트운동에 열성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역시 한번 스카우트는 영원한 스카우트였다.
역대 최고의 대회로 평가받은 세계잼버리대회는 옥에 티만 조금 있었을 뿐 화려하게 폐영식을 마쳤다. 옥에 티는 화장실 부족과 쓰레기 분리수거에 대한 불만 제기였다. 선진국에서 참여한 청소년들은 쓰레기 분리수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부분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시위까지 벌였다. 이제 막 쓰레기 분리수거를 시작해 경험이 부족했던 한국의 현실로는 미숙한 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쓰레기 분리수거는 시드니 제16회 세계잼버리대회를 보고 온 한국대표단이 국내에 처음 도입을 했다. 시드니 대회는 1987년 12월 31일부터 1988년 1월 9일까지 남부의 캐터랙트파크(Cataract Park)에서 열렸으며, 총 98개 국가의 1만 4,600여 명이 참가했다. 다음 개최지였던 한국은 준비 차원에서 준비실무위원까지 파견했다.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과 박건배 대표단장(해태그룹 회장)을 비롯해 많은 관계자들이 방문을 했다. 1987년 2월 18일에 구성된 제17회 세계잼버리 준비실무위원회에는 강태선 사장도 포함되었다. 실무준비위원들은 차기 개최국으로서 1987년 12월 23일에 시드니로 파견되었다. 각 시도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국장과 각 지역별 연맹의 국장, 이벤트 회사 관계자, 그리고 야영장비 준비를 위해 강태선 사장도 일행으로 참석했다. 그곳에서 강태선 사장은 세계의 등산 및 야영장비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행사 준비는 물론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벤치마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한국 청소년 대원들에게 필요한 한식 식자재를 구하러 교포사회를 열심히 뛰어다니는 일도 도맡아 처리했다.
강태선 사장은 “전 세계 텐트들이 한자리에 쳐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정말 장관이었죠. 나라별 텐트의 기능과 소재, 그 나라의 국민성과 소비자의 생각하는 바를 한눈에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처음으로 배우는 계기가 되었죠. 쓰레기 분리수거가 국가경제에 이바지 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깨닫고 한국 개최 때 실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17회 세계잼버리위원회가 1989년 2월 28일 발족해 실제 준비에 들어갔으며, 한국의 쓰레기 분리수거는 1990년 7월부터 서울시에서 시범실시를 처음 도입했다. 한편, 준비실무위원으로서 강태선 사장은 야영장에 제공되는 석유버너가 운영 및 안전상 문제점이 있음을 알고, 한국 세계잼버리대회에서는 가스연료로 전부 교체를 했다. 실제 대회 진행 중에 가스연료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소요되어 그는 사방팔방 밤낮으로 부족한 가스연료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시드니에 가서 좋은 공부를 한 그는 제품 개발 및 생산에도 적극 반영해 야영장비의 많은 기능들을 개선 및 발전시켰다. 등산장비 및 용품의 전문 노하우는 그렇게 쌓여갔다. 훗날, 강태선 사장은 포장마차에서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에게 술을 한잔 샀는데, 보이스카우트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국스카우트연맹 평생회원 제2호와 제170호는 밤이 늦도록 그날 시간을 보냈다.


 

스키에 얽힌 배짱 릴레이

동진레저백화점은 종로에 비해 엄청나게 커진 압구정 매장에 제품 디스플레이를 하는데 있어서 자금이 절대 부족했다. 사옥 신축 등 소요된 경비가 많았던 원인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키장비까지 들여놓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등산・레저 전문백화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끝없는 도전의 승부사 기질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강태선 사장은 스키 수입업체인 신한상사의 유기수 사장과 만나 담판을 지었다. 그는 등산장비 및 용품

을 수입하다가 스키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던 터라 잘 알던 사이였다. 그에게 스키 제품을 수입면장(수입신고필증) 그대로 넘겨달라고 부탁했다. 즉, 수입한 가격 그대로 달라는 무리한 요구였다. 한술 더 떠서 강태선 사장은 제품을 팔고 난 뒤에 대금 결제를 해주겠다고 했다.
큰 배짱에 큰 배짱이 서로 부딪혔다. 그는 수입한 제품을 수입면장에 적힌 가격대로 전부 다 넘겨주었다. 등산용품 수입업을 할 때 강태선 사장에게 도움을 받았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런 상호 신뢰는 참으로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솔직히 강태선 사장도 약간의 마진을 요구할 줄 알았다.
상대방은 사업할 스키장비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한 시즌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신한상사는 급하게 스키 장갑과 고글 등을 수입했고, 이를 계기로 이후 스키용품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그는 과거에 등산용품 수입을 하면서 1%의 가능성이 엿보여도 무섭게 달려드는 강태선 사장의 도전정신과 신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과감한 용단을 내렸던 것이다. 동진레저백화점은 어려운 첫 고비를 그렇게 넘겼다.
국내에 불기 시작한 스키 시장은 지금처럼 소비자에게 렌탈을 해주는 업체가 없었다. 스키와 폴대, 부츠 등을 갖춘 동진레저백화점은 성수기에 많은 제품을 팔았지만 재고도 상당히 많이 남았다. 붐이 일어난 스키시장에는 많은 업체들이 뛰어들기 시작해 경쟁이 금세 치열해졌고, 스키 쪽은 아무래도 전문 분야가 아니었기에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동진레저백화점 스키용품 매장>


결국, 세 시즌을 보내면서 쌓이는 스키의 재고가 경영상 압박을 하게 되었다. 등산과 달리 성수기 한철에만 팔려 상시적으로 운영하기에 벅찼다. 1994년부터는 스키 렌탈을 해주는 업체들이 시중에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래서 제품을 사지 않고도 스키를 즐기는 소비자도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선 사장은 거봉산악회 회원 중에 한 명인 최석현이 스키장비업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태선 사장은 그를 만나 의중을 물어보고는 모든 장비를 다 넘겨주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는 자금이 전혀 없고 아무런 담보도 내놓을 게 없어서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강태선 사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외상으로 가져가면 되지. 사업을 해서 형편이 닿는 대로 갚으면 돼. 어때?”
최석현은 강태선 사장의 제안에 너무 놀랐다. 거봉산악회 활동을 같이 하긴 했지만, 친하게 지내거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바도 별로 없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나란 사람을 너무 믿어주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최석현은 스키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기반을 잡는데 도움을 받았다. 그는 강태선 사장이 오로지 일과 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의 타고난 경영 기질과 자수성가한 대단한 배경을 알게끔 되었다. 이후 강태선 사장은 스키장비 및 용품의 비중을 낮추면서 사업을 경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