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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YAK HISTORY

산악인과 함께한 46년간의 끊임없는 도전, 히말라야를 넘어 세계로

치열한 전국시대 (1990-1995)

여가를 위한 넉넉한 사회로

“아시아에서 등산과 캠핑 붐이 유럽에 못지않게 고조된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었다. 앞으로 있을 몇 개 업체의 경쟁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의 등산용품 업계가 저급품 일변도에서 탈피하는 한편, 세계적인 한국 등산용품의 탄생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소비자들은 한번 해보는 것이다.”
1986년 8월 등산전문잡지인 월간 <산>의 기사 내용 중에 한 토막이다. 이후 한국의 등산용품 시장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거듭해나갔다. 등산용품 시장은 대기업의 잇따른 참여로 인해 전국시대의 과열된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86아시안게임 개최 때 약 600억 원으로 성장한 시장은 88서울올림픽 때에 이르러 약 750억 원 정도로 커졌다. 배낭, 코펠(Kocher), 버너(Burner), 매트리스, 스카프, 양말 등 대기업이 취급하지 않는 상품은 거의 없게 되었다. 1993년에는 약 2,000억 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업계의 예측에 따라 그 치열함은 한층 가속화되어갔다. 그래도 대기업들이 뛰어놀기에는 큰 시장은 아니었다. 중소기업 업종 보호와 같은 단어는 역시나 고려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1990년에 자동차 생산 세계 10위, 교역 12위로 부상했다. 1988년부터 주5일근무제, 격주5일근무제 권장 및 확대 조치로 근로시간은 단축되어갔고, 삶의 질을 따지는 사회 분위기가 제법 조성되었다. 소득이 늘면서 여가를 즐기려는 인구는 매년 30~40%씩 신장되었다.
사회가 다양화 추세를 보이면서 건강열풍도 불어왔다. 종합건강검진 예약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새벽에 약수터를 오르거나, 에어로빅, 수영, 헬스클럽등을 다니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레저・스포츠는 점차 생활 속에 그 뿌리를 내렸으며, 웬만한 백화점이나 대형 운동구점에 가면 잠수장비나 윈드서핑장비가 쉽사리 눈에 띄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외국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일이었다. 수상스키나 행글라이딩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삶을 즐기려는 비용 역시 욕구만큼 높아졌다. 볼링이나 스키는 고급스포츠에서 중급스포츠로 점점 내려왔으며, 골프 인구도 약 1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산장비 및 용품 시장은 서로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로 각축을 벌였다. 신제품 개발과 출시, 첨단 소재 적용, 외국 유명브랜드 제휴 및 도입, 하청 OEM 생산 확대 및 해외 현지 공장 건설, 수출 위주에서 내수 시장으로의 적극 참여 등 혼전의 양태를 보이게 되었다. 이처럼 등산 및 레저 인구가 늘면서 출판가에서는 이색적으로 지도산업이 활기를 띠기도 했다. 자동차 보급률까지 높아지면서 지도에 대한 수요와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1990년 3월에는 제1회 국제산악장비전(KOMOUNT ’90)이 한국종합전시장(KOEX)에서 개최되었다. 이제 약 500만 명에 달하는 국내 등산 인구를 근간으로 산악장비 및 관련용품에 대한 수요가 급속도로 증가한 추세를 반영한 국제행사였다. 등산전문 국제행사로는 처음 개최되었는데 대한산악연맹과 한국무역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산악관련 장비의 수출 및 내수 확대를 위한 이 행사에는 히말라야 등반장비전과 함께 세계 유명 산악사진전도 같이 마련되었다.
1990년에 이르러 등산장비 및 용품 시장은 1,000억 원으로 추산되었다. 대표적인 상품은 텐트, 배낭, 버너, 코펠이었다. 눈독을 들인 대기업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왔지만, 전문업체들의 제품이 그리 쉽게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준레포츠의 ‘쟈칼’이나 진웅의 ‘퀘스트’, 수출전문이던 삼선교역의 ‘버팔로’ 등이 선전했다. 동진산악으로 알려진 동진등산장비총판은 1990년 ㈜동진레저백화점으로 거듭나면서 ‘프로자이언트’로 경쟁에 임했다. 이외에도 메아리산악, 중원상사 등의 중소기업도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판촉활동을 펼쳤다. 등산용 버너의 경우에는 백천의 ‘로얄’, 협승물산의 ‘캡틴’, 대웅물산의 ‘코베아’, 제일금속의 ‘라이온’ 등 여러 중소기업들이 버텼다.
등산화 전문 업체의 경우는 ‘RF(레드페이스)’의 RF상사, 1978년 3월에 공장을 차리면서 ‘K2’라는 브랜드를 내놓은 한국특수제화가 있었다. 여기서 같이 동업하다가 ‘K2’ 브랜드만 갖기로 하고 독립한 K2상사, 수제품으로 유명했던 송림제화, OEM으로 수출만 하다가 1994년 ‘트렉스타’ 브랜드를 내놓은 성호실업 등이 있었다.
코오롱을 비롯한 대기업들은 의류 쪽에서 강세를 보였으며, 텐트 등을 시판하면서 고가화 전략을 펼쳤다. 특히 대기업들은 가격이 제법 많이 나가는 텐트 판매에 욕심이 많았다. 삼성물산의 ‘라피도’, 제우교역의 ‘아디다스’, 화승의 ‘르까프’, 아식스스포츠의 ‘아식스’ 등 소비자들 귀에 익은 브랜드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대형 제화회사인 금강제화와 에스콰이아, 엘칸토도 등산화와 골프화 등 특수화 생산에 적극 뛰어들었다. 제품의 품질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실정이었는데, 제품 이미지의 친숙도에 따라서 상품을 선택하는 소비 경향이 점점 짙어졌다.


취사야영금지의 늪

1989년 7월 월간 <암과 설>이 나오고, 1989년 10월에는 월간 <사람과 산>이 창간되었다. 산악전문지의 잇따른 탄생은 1990년대를 맞이하는 산악문화계가 더욱 풍성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등산장비 및 용품업계를 위축시키는 사건도 터졌다. 1990년 10월 18일 정부는 11월 15일부터 북한산 등 11개 국립공원에서 취사와 야영을 금지시키겠다고 전격 발표를 했다. 11월 1일부터는 태백산 등 52개 도립공원, 군립공원, 유원지에서도 취사행위가 금지된다고 했다. 또한 13개 국립공원의 27개 구간 등산로를 1991년부터 3년 동안 폐쇄시키기로 했다. 안식년의 입산금지 제도를 도입한 것이었다.


<산중에서 취사를 하고 있는 야영객>

쓰레기 오염 문제와 함께 민족 정서의 산실을 놀이터로 전락시킨 산악문화를 바로잡겠다는 취지였으나, 산악인의 기본권이 갑작스럽게 제한되는 일이기도 했다. 비뚤어진 개발정책이야말로 산 파괴의 주범인데 민주적인 절차 없이 결론부터 짓고 공표되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밥을 먹기 위해 산에 오르는 딱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아졌는가. 산을 타고 전쟁이 벌어졌던 때문일까. 아니면 셋방살이 하면서 고기 굽는 냄새피우기 무엇하여 산에 올라 구어 먹던 눈치 보던 버릇 때문일까. 이제 우리도 국제적인 문화국민의 긍지를 높여 가야할 때가 되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휴식은 우리나라 택지의 1할에 육박하는 골프장의 ‘그린’이 책임지고, 이 땅의 대다수 국민들은 주말에 산에 가서 밥도 제대로 지어먹지 못하고 김밥이나 빵으로 끼니를 해결해야하는 시대가 왔다. 우리의 자연환경은 분명 새로운 차원의 보호책과 의식을 요구할 만큼 피폐되었다. 범국민적 공감대 위에 선 환경위기를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시 한겨레신문의 기사 내용이다. 국토 활용이나 관광 개발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독점자본들이 전국 명산마다 관광도로부터 뚫고 대규모 위락단지를 설립해온 국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자연보호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무조건 금지로만 쉽게 풀려는 정부 규제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일었다. 그동안 산악인들이 앞장서온 자연보호 활동도 상당한 실효를 거두고 있는 마당에 공청회 등의 여론 수렴 과정도 없이 산악인들 모두를 몰지각한 자연파괴 집단으로 몰았다.

<취사야영금지를 시범 운영한 북한산국립공원>


특히, 등산관련 업계는 아주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매기(買氣)가 뚝 끊겨 제조업자와 상인들은 모두 울상을 짓게 되었다. ‘나라는 망하였으나 산과 강은 그대로다’라는 두보(杜甫)의 시가 ‘나라는 그대로이나 산과 강은 망했다’라는 내용으로 바뀌는 슬픈 심정이었다. 등산장비와 용품 시장에는 찬물을 끼얹는, 아니 빙하시대가 도래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우려되었다.
하지만 호연지기의 산사람들은 산을 언제나 사랑해왔듯이 정부의 발표에 자발적으로 협조하였다. 마침내 1990년 12월 17일, 산림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1991년 3월부터 취사 및 야영금지, 산불 경방기간 설정이 전면 시행되었다. 이후 얼어붙은 시장은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의 칼끝으로 등산장비 및 용품 업계를 겨누게 되었다.

경기 불황과 아웃도어의 싹

1991년 1월 7일, 한국등산장비업체총연합회가 창립되었다. 등산장비 제조업체와 판매업자들이 모여 취사야영금지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업계는 내우외환의 코너에까지 내몰렸다. 1991년 1월 17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전쟁이 터져버렸다. 쿠웨이트가 원유시장에 물량을 과잉 공급하여 비롯된 유가 하락 때문에 이라크 경제가 파탄에 내몰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걸프전쟁으로 인해 한국 경제는 물가 상승과 유가 불안, 경기 침체의 늪에 빠졌다. 고성장을 거듭하던 경제성장률도 1992년에는 5.9%로 낮아졌다. 이는 1980년 이후 최악의 성적표였다. 또한 유가는 5년 만에 1리터당 500원대를 다시 돌파했다.
초고속 상승세가 한풀 꺾인 등산용품 시장은 판도가 재편되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코펠과 등산화, 레저용 의류와 텐트를 제조하던 메이커들이 경기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부도를 내거나 도산했다. 1993년 2월 쟈칼 브랜드로 널리 알려진 대준물산이 부도를 냈다. 연간 2,000만 달러 이상의 수출을 기록하던 탄탄한 회사였다. 남대문 등산용품상가의 경우에는 취사야영금지 이후에 20~30개 상점 중에서 10여 개 정도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런 와중에, 등산 및 방한복 등 아웃도어 의류시장 개척에 나서는 세력도 나타났다. 1992년 일본의 레저의류 전문업체인 골드윈(GOLDWIN)과 이토추상사(伊藤忠商社), 한국의 영원무역이 합작으로 골드윈코리아를 설립했다. 1974년에 설립된 영원무역은 스포츠의류 수출업체였다. 주로 외국 유명 브랜드의 OEM 생산기지였다가, 1991년부터 ‘영원(YOUNGONE)’이라는 스포츠의류 독자 브랜드를 내놓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처럼 몇 년째 불황을 겪고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아웃도어 관련 상품만은 신장을 거듭했다. 아웃도어란 용어는 1994년부터 일부 국내 언론에서 조금씩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웃도어 상품은 레저나 여가 활용 등 외부 활동 때 쓰이는 제품이다. 그런데 야외에서 사용되던 상품들이 일상적인 생활용품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고어텍스(GORE-TEX) 원단의 윈드브레이커 등은 원래 아웃도어용 의류였으나, 이제는 평범한 나들이용 옷으로 취급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또한 캠핑카를 대신해 RV(Recreational Vehicle) 차량이 인기를 끌었고, 캠핑용품 시장도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하고 있었다.
이웃나라 일본의 아웃도어 시장은 일시적인 유행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 기준과 생활 방식을 가진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폭넓은 소비의 새로운 생활 영역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아웃도어 레저는 자연과의 교류를 축으로 크게 확대되어갔다. 일본의 이런 경향들은 곧 한국에서도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진 일본의 골드윈은 불황 속에 있는 한국으로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1995년 3월 화승은 독일의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인 살레와(Salewa)를 새로 도입했다. 뒤이어 4월에는 일본의 유통회사인 다카미야가 한국다까미야를 직접 설립하고, 아웃도어전문점 ‘포인트’를 서울과 부산에 개점했다. 1993년 7월 국내 유통시장 개방 이후에 일본 유통회사가 전액 출자한 일은 처음이었다. 한국다까미야는 낚시, 등산, 캠핑, 해양 스포츠 등에 있어서 도소매와 체인화 사업을 노렸다. 일본 전역에서 50여 개의 대형 점포를 운영해온 노하우로 무장된 회사였다. 낚시 쪽에서는 기반이 강한 회사였는데, 6~7년 전부터 등산과 캠핑 쪽에서 품목을 크게 다양화시키고 있었다.
한편, 1995년 4월에는 미국 브랜드인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를 일본의 골드윈이 한국 특허청에 상표권을 출원했다. 한국 진출의 서곡을 알리는 일이었다. 등산 방한복 등 이른바 아웃도어의류 시장 개척에 나선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노스페이스는 1968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등산 가게로 시작해 성장한 유명 브랜드였다. 이러한 소식들로 업계는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게 되었으며, 대기업들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등산의류쪽은 대기업이 강세를 나타냈고, 등산장비 및 용품 쪽에서는 중소기업이 우위를 보였다. 하지만 장비와 용품 부문의 시장은 한계가 보이는 모습이었고, 의류 부문은 여지가 많은 시장 형태를 보였다.



도도한 물결을 타고 산악 강국으로

해외 원정 러시라는 도도한 물결을 타고 한국의 산악계는 1990년대를 맞이했다. 1989년 1월부터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면서 여권 발급 등 각종 규제가 철폐되었다. 물론 전문 산악인의 출국은 훨씬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1977년 9월 고상돈 대원의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한국의 산악사는 세계의 산악사로 그 위상이 올라갔다. 그 이후, 등반 가치보다 사회적 보상과 가치에 더 눈독을 들인 히말라야 등반대도 일부 없지는 않았다. 히말라야 만년설에 몸을 던져버리는 것을 최고의 알피니즘으로 착각한 무리도 일부 있어다는 뜻이다.
1980년대에 한국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러시는 봇물을 이루었다. 매년 10여 개 이상의 원정대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89년에는 무려 19개 팀이 원정에 나서 세계 최다 파견국이 되었다. 특히 한국의 원정대는 동계등반을 많이 하였다. 동계등반은 ‘보다 다양하고 보다 어렵게’라는 등산 정신에 부합되는 양식이었지만, 사실은 네팔 당국의 입산 허가가 이미 줄을 서서 기다릴 수 없을 만큼 포화상태라 동계등반에 나선 측면도 있었다. 남보다 빨리, 남보다 먼저 등정하겠다는 의식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해외 원정 과열의 모습이었다.
그러다보니 훈련과 준비 등에 있어서 소홀한 측면이 일부 있어 등정에 실패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히말라야 동계등반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람이었다. 겨울철 히말라야는 제트기류가 분다. 히말라야 제트기류를 만나 살아난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 정도는 무참히 휩쓸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계등반은 준비가 더욱 잘되어 있어야 하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동계 초반이 등반 최적기였다.
한국은 1987년 12월 허영호 대원이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전 세계에 그 실력을 과시했다. 이렇게 1980년대 고봉 등반의 적응기를 거치고 1990년대에는 본격적인 원정 활동과 기록을 배출하는 시기에 도달했다. 특히 8,000m급 14좌 등정을 향하는 원정대가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1990년 8월에는 소련의 파미르고원(Pamir Plat.) 최고봉인 코뮤니즘(Communism Peak, 7,495m)을 합동대가 등정했다. 출국 전에 합동대의 한 대원은 “동구권 산악인들과 만나 한국 산악계의 등반 및 장비 수준을 보여주는 기회도 아울러 갖겠다.”라고 언론과 인터뷰했다. 한국 산악계의 자신감이 물씬 묻어나는 장면이었다. 1990년 6월에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 8,125m)에 도전한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는 난코스를 넘지 못하고 실패했다. 거봉산악회 소속으로 참여한 엄홍길 대원은 귀중한 경험을 쌓고 돌아왔다.
1991년 5월 오로라탐험대는 한국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 허영호 대장은 세계 18번째 쾌거를 올렸다. 이어서 7월에는 세계 13번째 봉우리인 히말라야 가셔브룸 Ⅱ(Gasherburm Ⅱ, 8,035m)를 한국의 원정대가 올랐다. 이번 원정대는 산소마스크와 셰르파 없이 대원 전원이 등정하는 개가까지 올렸다.
1991년 10월에는 히말라야 시샤팡마(Shishapangma, 8,027m)를 김창선, 김재수 대원이 한국인으로서 초등정했다. 원정대는 시샤팡마와 초오유(Cho Oyu, 8,201m) 연속 등정을 노렸으나, 초오유는 7,400m에서 발길을 되돌려야만 했다. 김창선 대원은 “정상은 환희 아닌 고통이며, 두렵기에 더 큰 매력이 있다.”라며 “극한 도전에서 인생을 배운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와 에베레스트를 함께 등정한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산악인 피터 하벨러(Peter Habeler)는 1992년 11월에 내한하여 “한국은 명산이 많아 유능한 산악인을 배출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한국은 세계적인 유명 산악인을 많이 배출한 나라답게 등산복, 등산화, 텐트 등 등산장비도 세계적인 수준인데다 값도 적절해 사업 전망이 밝습니다. 스키장비도 아주 품질이 우수해 산악인들의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제 한국의 산악인과 기술 및 장비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다음해인 1993년은 신기록의 행진이었다. 4월에는 히말라얀클럽에 가입한 허영호 대장이 중국령 초모랑마(에베레스트)에서 네팔령 쪽으로 세계 최고봉 횡단 등정에 성공했다. 한국 최초였으며, 세계 2번째 쾌거였으나 공인 기록이 되지 못했고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시켰다. 5월에는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의 지현옥 대장과 김순주, 최오순 대원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최초의 한국 여성이 되었다. 세계 3번째 영광이었다.
바로 이어서 5월에 박영석 대원은 한국인 최초이자 세계 18번째로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이 과정 속에서 동료 2명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무산소 등정은 뇌와 호흡기에 손상을 당하거나 정신 착란 상태에 빠지는 위험 때문에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꺼려했다.
1995년 10월에는 김영태, 박정헌 대원이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최초로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 원정대는 등반 시기를 조금 더 늦췄으면 큰 봉변을 당할 위기였다.


같은 해 11월 에베레스트는 며칠 동안 최악의 눈사태가 일어나 100여 명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갔다. 일본인 13명, 이탈리아인 30명, 프랑스인 4명 등을 비롯해 수많은 산악인과 셰르파들이 죽었다. 이전까지는 1972년 한국의 원정대가 마나슬루에서 15명의 희생을 치른 일이 히말라야 조난 사건 중에서 가장 최악의 기록이었다.
한국은 극한의 높이인 8,000m급 봉우리의 등정자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14좌 등정 기록을 세울 수 있는 영웅의 얼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5년까지 4개 봉우리를 오른 허영호, 김창선을 어느새 추월한 산사나이 엄홍길 대원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그는 1988년 에베레스트에 이어 1993년에 초오유와 시샤팡마, 1995년에는 마칼루와 브로드피크(Broad Peak, 8,047m), 로체를 등정하면서 6좌 등정의 기록을 세웠다. 특히 브로드피크는 한국 산악인의 8,000m급 거봉 14개의 마지막 초등정 과제이기도 했다. 이제 아시아 최고 기록으로 일본인이 세운 9좌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
한편, 히말라야 14좌 등정과 다른 길을 걸었던 산악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허영호였다. 그는 1995년 12월 11일에 남극의 최고봉 빈슨매시프(Vinson Massif, 4,892m) 봉우리에 오르면서 3대 극점과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밟은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라는 대위업을 이루었다.

<1993년 초오유・시샤팡마 원정대>